누가 쓴건지도 모르겠고. 암튼 상당히 긴 글인데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네요
영화로 만들면 엄청 볼만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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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길한 취재(1)
승용차는 어느덧 비포장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정확히 5시간이 지난 후였다. 덜컹거리며 차의 요동이 심해지자 옆좌석에서 자고 있던 김한수 기자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부시시 눈을 뜨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 무슨 길이 이렇게 험하냐?"
"포장이 안되서 그래요. 눈 좀 더 붙이지 그래요? 이런 길로 앞으로 한시간은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카메라맨 이창수가 연신 멋대로 돌아가는 핸들을 움켜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김기자는 그의 말대로 또다시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잠든 동안 내내 께름칙한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qbs 방송국의 뉴스 보도국 취재기자와 카메라맨이었다. 보도국이란 곳은 원래 사람 잡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김기자가 이번주 내내 취한 수면의 양은 모두 합해야 10시간도 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은 지금처럼 차안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었다. 이젠 5년된 그의 엑셀 승용차가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면도도 차에서 하고 옷도 차에서 갈아 입는다. 그는 보도국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사회부 기자였다. 온갖 지저분한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죄다 끌어다 놓은 곳이 사회부란 곳이었다. 그곳에서 버티려면 같이 쓰레기가 되고 잡동사니가 되어야만 했다.
"젠장, 길 한번 더럽게 험하네"
눈을 잔뜩 찌푸린 이창수의 말대로 길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몸의 균형조차 잡기 어려울만큼 점점 더 험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험한 곳까지 들어와 세명씩이나 사람을 죽였는지.... 아참 김기자님, 뒤에 카메라 괜찮은지 좀 봐주세요. 또 저번처럼 i.c라도 나갔다간 저, 아주 돌아버립니다"
"걱정하지마. 내가 아주 단단히 고정시켰으니까!"
"어차피 오늘 마감뉴스에도 내보내긴 어려울 것 같은데 아예 새벽에 출발할걸 그랬나 봐요. 그랬으면 한 세시간이면 왔을텐데"
"괜히 새벽에 있는대로 밟아 달리다 황천길 가면 박기자가 우리 취재하러 오는 수가 있어. 차라리 조금 여유있게 오는게 낫지"
그들이 목촌리라는 낡은 이정표와 함께 약간의 공터가 있는 막다른 길에 도달한 시간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이정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는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작은 오솔길이 숲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오지중에 오지구만!"
카메라를 챙기며 이창수가 투덜거렸다. 그의 그런 불평과는 대조적으로 하루해를 마감하는 붉은 노을은 늦가을의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어 숲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눈부신듯 김기자가 노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올해는 이렇게 단풍구경 한번 하는 거지 뭐!"
"됐습니다. 조금 있으면 끔찍한 시체들을 카메라로 찍어야 할 판인데...."
오솔길로 접어둔 후 20여분 지나자 숲은 어느새 칠흙같은 어둠으로 변해있었다. 앞장 선 김기자의 조그만 렌턴 불빛이 그들의 앞길을 불안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고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이미 두사람의 등줄기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이 여기 밖에 없나? 이런 산길은 혼자 다니려면 제법 겁나겠는데요? 으시시한게 어디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게.... 이 안쪽에도 사람이 산대요?"
"사건 현장에서 한 1킬로 떨어진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이쪽 강원도 오지엔 이보다 더한 산속에도 사는 사람들이 있다구. 대부분 약초 같은 것 케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지"
"김기자님, 천천히 좀 가요. 빈몸이라고 그렇게 빨리 가면 어떡합니까?"
이창수는 내심 겁이 나는지 김기자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겁이 나긴 김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며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이름모를 짐승의 울음소리와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운 칠흙같은 어둠. 그리고 무엇보다 등산 객 세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그 살인마가 바로 이 숲 어디엔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어둠을 헤치며 한 40여분을 부지런히 걸어가자 그들의 앞에 꽤 넓직한 개울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개울위에는 낡은 목조다리 하나가 위태롭게 놓여 있었고 그 너머 멀리서 마을 인가의 불빛이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둘은 불빛에 겨우 한숨을 내쉬며 삐걱거리는 목조 다리를 건너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두사람이 현장에 도착하자 그곳엔 의외로 한 10여가구는 됨직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은 쥐죽은듯 고요했으며 더우기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과 현장 사이에는 조그만 고개가 하나 가로막혀 있었고 고개를 넘어서자 서너명의 경찰들과 너댓명의 주민들이 현장을 둘러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 사람들 보이니까 엄청 반갑네"
이창수가 다소 힘이 나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사람이 주민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사건 현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믐달을 뒤로 하고 유령처럼 버티고 선 음침한 기와집이었다. 그 기와집을 보는 순간 김한수 기자는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무척 오래된 듯 방문은 하나같이 부서졌고 찢어진 한지가 볼상사납게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와집 앞마당 무수히 자란 잡초위에 세구의 시체가 가마니로 덮힌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
김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qbs 뉴스 보도국의 김한수기잡니다. 사건 취재차 지금 막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여기 책임자가 어느 분이신지?"
"제가 책임잡니다. 이번 사건때문에 횡성군에서 파견나온 윤형삽니다"
그녀의 말에 김기자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반문해 왔다.
"왜요? 뭐가 잘못 됐나요?"
"아... 아닙니다. 시체가 오늘 아침에 발견 되었다구요?"
김기자가 시신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아참, 얘기하는 동안 저희 카메라맨이 취재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대신 시신 촬영은 안됩니다"
"가마니에 덮힌채로는 괜찮겠죠?"
윤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기자가 이창수에게 소리쳤다.
"주변 스케치 좀 하고 특히 저 앞에 낡은 기와집 좀 잘 잡아. 시신은 있는 그대로 슬쩍 덮어 주고...."
취재팀 때문인지 주민들이 다소 술렁 거렸지만 이내 잠잠 해졌다. 곧 그들은 이창수가 하는 일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막연한 공포심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자신들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이 셋 씩이나 죽었으니.
1. 불길한 취재(2)
"신원은 확인 됐나요?"
"예. 한 사람은 k일보 신문 기자이고 나머지 둘은 모 잡지사 기자들이었습니다. 자세한 인적사항은 따로 적어 드리죠"
"신문 기자와 잡지사 기자요?"
"취재를 하러 왔다가 변을 당한 것 같은데 무엇을 취재하러 왔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사인은 뭡니까? 살해된 것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한가요?"
"아직 뭐라고 확실히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부검해 보기 전에는"
"대충이라도 짐작가는게 있을 것 아닙니까?"
"글세요"
"혹시 목격자가 있습니까?"
"현재로선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살해된 것인가요?"
"아직 살해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아까 말씀 드렸을텐데요?"
"아, 그래요. 그럼 여기 이곳에서 사망한 건가요?"
"그것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쌀살하게 대답하는 윤형사의 표정에서 김기자는 그녀에게 특기할만한 정보를 얻기는 어려우리라는 판단을 했다. 앞뒤가 뻔한 얘기라해도 촌구석에 말단 형사가, 그것도 임시로 파견 나왔을 여형사가 공식화되지 않은 자신의 사견을 함부로 얘기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묻는 것보단 자신이 직접 시신을 보는 편이 빠를 듯 했다. 이젠 자신도 웬만한 베테랑 형사 뺨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시신을 좀 봐도 될까요?"
"보시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반발심이었는지 그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사회부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잘 모르시나본데 우리도 웬만한 형사들보단 험한 꼴 더 많이 보고 다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젠가 그는 한꺼번에 30구의 시체를 본 적도 있었다. 시외버스가 50미터 절벽 아래로 구른 교통사고였다. 팔이 잘리고 얼굴이 뭉개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제 그에게 시체 따위를 보는 일은 백화점에 진열된 마네킹을 보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김기자가 렌턴을 아래로 비추며 구둣발로 가마니를 슬쩍 걷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발작적으로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까지 많은 시신을 봐 왔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신의 이곳 저곳에는 마치 홈이 파인 흉기 같은 것으로 찌른 것처럼 굵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구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섬뜩하게 만든 것은 시신의 부릅 뜬 눈동자에 아직
도 남아있는 형언키 어려운 공포의 잔재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살려달라며 달려들 것 같았다.
"도..... 도대체 뭘로 죽였길래?"
"그러게 부검을 해 봐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둘도 마찬가진가요?"
김기자가 두려운 눈으로 윤형사를 돌아 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사실 나머니 두구의 시신은 보고 싶은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만 했다. 추정 기사라도 쓰기 위해선.
그는 이번엔 먼저보다 훨씬 신중하고 조심스런 동작으로 다시 두번째 가마니를 들추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욱'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 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심한 구토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며 머리끝이 쭈삣하는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아 왔다. 두번째 시신은 거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울만큼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마치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얼굴 한쪽이 거의 없어져 버렸고 오른쪽 팔꿈치 아랫 부분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특히 가슴부분의 손상은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초원의 맹수에게 뜯어 먹히다 만 사슴의 내장을 연상케 했다. 몇번의 구토와 함께 김기자는 세번째 시신은 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 * *
교양 제작국의 정해일pd가 보도국 김한수 기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3시경이었다. 그들은 대학동창이자 qbs의 입사동기 였다. 그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안간힘을 쓰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방금전 김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이 꿈속 처럼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살인사건 취재 때문에 강원도 횡성 쪽을 다녀왔는데 그 테잎을 편집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의 차분한 성격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으며 약간의 두려움까지 섞인 듯 했다. 그는 한없이 가라앉는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방에 불을 밝혔다. 방 한쪽 구석에는 멋대로 벗어 제낀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시계는 언제 밧데리가 떨어졌는지 잠자기 전부터 줄곧 8시 50분만 가리키고 있었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도 그가 아직 독신인 이유는 전적으로 그 망할놈의 pd라는 직업때문이었다. 청바지위에 셔츠 한장과 가죽잠바를 대충 걸치 고 현관을 나서려다 그는 뭔가 잊은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쇼파 위에 검은 캡모자를 집어 눈썹까지 푹 눌러쓰곤 비로소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겨울처럼 매서웠다. 그는 달리듯 자신의 엘란트라 승용차까지 가서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추위로 이빨이 아래위로 부딪혀 왔지만 다시 올라가 옷을 더 껴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엔진이 체 달기도 전에 그는 깊숙히 악셀을 밟았다. 그의 집은 잠실이었다. 올림픽대로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승용차의 속도계는 160을 가리켰다.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4분이었다.
1. 불길한 취재(3)
그가 보도국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김한수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편집실 모니터에는 어느 공포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음침한 기와집 한채가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막 조그셔틀을 만지려는 순간 김한수가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섰다.
"어? 벌써 왔어? 또 있는대로 밟았구만?"
"야, 잔말말고 그 손에 들린 커피나 빨랑 주라, 오는데 얼어 죽는줄 알았다. 이젠 완전히 겨울이다, 겨울!"
김한수에게서 건네받은 커피를 한모금 입에 넘긴 해일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성질 급한건 여전하구만, 그렇게 벌벌 떨지 말고 옷이나 좀 챙겨 입고 나오든지"
"새벽에 황당하게 사람 불러내 놓고 이젠 잔소리까지 늘어 놓을려구? 남 걱정 하지 말고 그렇게 불 나는 일이 뭔지 어서 용건이나 말해. 나 빨리 들어가서 다시 자야 돼! 요즘 귀신들한테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구"
농담같은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 김한수의 얼굴엔 금새 웃음기가 가셨다. 해일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웬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 본론부터 말할께! 너 요즘 귀신에 대한 특집 다큐 제작중이랬지?"
"그래서?"
"그럼, 혹시귀신을 찍거나 본 적은 있어?"
"자식! 지금 농담하냐?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정말 귀신이 있어서 프로그램 만드냐, 요즘 사람들 워낙 그 쪽으로 호기심이 많으니까 부랴부랴 특집 편성한거지. 근데 갑자기 그 얘긴 왜 묻는거야?"
잠시 망설이던 김한수가 이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오늘 내가 취재 가서 찍은 테잎인데....."
"아까 들어오면서 봤어. 근데, 요즘은 보도국에서도 귀신 찾아 다니냐?"
"그게 아니라.... 저 곳에서 오늘 세명의 등산객이 살해 당했어"
그리곤 책상위에 종이 몇장을 집어 건네며 계속 말했다.
"이따 읽어봐, 이건 그 사건에 대해 내가 작성한 내일 아침 뉴스 기사야!"
"젠장 내일은 시민들이 출근길을 살인사건 뉴스로 시작 하겠구만. 근데 그게 어쨌다는거야?"
"테잎을 잘 보라구"
말을 마친 그가 테잎을 되감아선 풀레이 했다. 카메라는 폐허가 된 기와집의 처마에서 부터 천천히 아래로 앵글을 움직이고 있었다. 부서진 문짝들, 찢겨져 너풀거리는 한지, 검게 그을린듯한 처마 기둥, 그리고 주위론 온통 어둠뿐이었다. 뭘 보라는건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열심히 화면을 보던 해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잠깐, 거기!"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 곳에서 멈추었다. 멈추어진 화면에는 카메라 가 기와집의 창고 내지는 부엌으로 보이는 왼쪽편의 부서진 문짝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서진 문짝 틈새 어둠속에서 뭔가..... 뭔가 번쩍이는 것들이 있었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그것은 반딧불 같기도 하고, 혹은..... 광채를 내뿜는 짐승의 눈 같기도 했다. 더우기 그것들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족히 열두세개는 될듯이 보였다. 정민수는 눈을 더욱 찡그리고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저게 뭐야? 뭘 찍어 온 거야?"
김한수는 대답 대신 다시 화면을 플레이 시켰다. 카메라가 이번에는 기와집 대신 바로 김한수 자신과 낯선 남자 한 사람을 잡고 있었다. 김한수가 빠르게 말했다.
"내 옆에 있는 남자는 현장에 있던 형사야!"
두사람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 되면서 그들의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들의 모습이 막 화면 안으로 들어 올 때였다.
"잠깐, 저건 또 뭐지?"
이번에도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곳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김한수도 이미 그 곳에서 화면을 정지시키려고 준비한 것 처럼. 해일은 다시 화면 앞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화면은 김한수와 형사라는 사내가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바로 뒤 어둠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형체는 희미해서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화면을 막 오버랩 시킬때와 같이 보일듯 말듯 희미한 모습으로 버티
고 선 것은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보던 해일이 김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뭘 찍어 놓은거야? 카메라 포커스를 잘못 잡은 것 같지도 않고"
"사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몰라. 물론 카메라맨도 전혀 모르고.... 분명히 현장에서 촬영할때 화인더에는 아까 보았던 그런 광채나 지금같이 저런 이상한 형상 같은건 전혀 없었다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떠냐?"
"어떠냐니?"
김한수의 질문에 반문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어 그를 돌아보던 해일은 그제서야 그가 이런 새벽에 자신을 급히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넌 저게 카메라에 귀신이 찍힌 것이라고 생각한다는거야?"
"카메라에도 이상이 없고 현장에선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저 이상한 것들을 뭘로 설명하지?"
김한수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해 보였다. 해일은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그 이상한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고 마침내는 해일 바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함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테잎을 돌려가며 두가지 이상한 형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무엇으로도 그것들을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현장에 있던 주민한테 얼핏 들은 얘긴데 말야, 그 집엔 귀신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취재한답시고 설치다 괜히 무서운 화를 당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지 않겠어?"
"그래서, 설마 그 주민의 얘기를 믿는단 얘긴 아니겠지? 사실 나두 귀신의 존재를 전혀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특집 프로 제작하면서 오히려 귀신이란 존재가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허상이란 확신이 들더란 말야! 대부분의 귀신 목격자들을 취재하러 다녀보면 뭔가 앞뒤가 않 맞는 구석이 반드시 한 두개씩은 나오더라구. 자신의 체험을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나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공통점이구. 귀신이 나온다는 온갖 음침한 곳과 집들을 다 찾아 다니며 카메라로 찍어댔는데 귀신의 모습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한번 찍힌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이번 프로그램의 결론을 아예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끌고 가기로 했어. 사실 처음 기획부터가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구"
해일은 상당히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한수는 그의 얘기에 단 한마디 반박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열띤 논쟁을 벌이곤했으니까.
"그래,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얼마나 황당한 얘길 하고 있는지 잘 알아. 하지만 사람에겐 이성적인 논리나 합리성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이나 본능같은게 있잖아. 처음 현장에서 그 기와집을 보았을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그야말로 지옥문 앞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더란 말야. 난 그기와집을 그 곳에서 처음 본게 아니었거든. 서울서 내려오는 차안에서.... 잠든 동안 내내 나는 꿈속에서 그 기와집을 봤어. 뭔가에 계속해서 쫓겨다녔던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아"
김한수는 지금도 그 당시의 기분이되살아 나는지 양 어깨를 움츠렸다. 몇 시간후에 보아야할 이상한 기와집을 미리 꿈속에서 보았다는 김한수의 말에 해일은 비로소 쉽게 무시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때 다시 김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뿐이 아냐! 화면속에 그 이상한 형상이 도대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거야. 마치 나를 잡아 먹을듯 노려보는 것 같더라구! 게다가 그 집앞 마당에 있던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신들. 그 시신의 눈.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는 무서운 공포가 깃들어 있었어! 자꾸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창피하게..... 하여튼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했어. 어차피 판단은 네가 해야 하 니까. 아까 건네준 자료에 모든걸 자세히 적어 놨어. 집에 가서 읽어봐!"
김한수는 거기까지 얘기하고 급히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2년전부터 완전히 담배를 끊었던 그 였다. 오랫동안 김한수를 봐 왔지만 오늘같은 그의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얼마 후 해일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편집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승용차 속도계는 한번도 120을 넘지 않았다.
2. 귀신이 찍힌 테잎(1)
한국대학 손남의박사는 정민수 pd가 가지고 온 vhs 테잎을 십여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보는 동안 연신 몹시 흥미로운 일이라고 감탄하듯 소리쳤다. 그는 민속학, 특히 무속신앙 분야에서는 거의 국내 최고임을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자문들은 해일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내가 보기엔 귀신(鬼神) 현상이 맞는 것 같군요. 외국 에선 몇 번 이런 테잎을 본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이런 테잎을 보기는 처 음입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손박사의 놀랍다는 표정과 그의 말에 해일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새삼 화면을 쳐다 보았다. 여전히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그 미지의 형상. 저것이 귀신이라니. 손박사의 얘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 어둠속에서 푸른 광을 뿜고 있던 것은 금수(禽獸)의 귀(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수라면?"
"짐승이죠. 그리고 두번째 형상은 사람의 귀인 것 같습니다. 물론 화면만 보고 확실하게 단정하긴 어렵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어떤 증거보다 귀신현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금수나 벌레, 물고기 같은 생물도 귀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경우는 죽으면 그 생명이 혼(魂), 귀(鬼), 백(魄) 세가지로 분열됩니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귀는 공중에 존재하게 됩니다. 즉 사후 인간은 천(天), 지(地), 인(人) 세곳에 걸쳐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들 삼자중 귀와 백이 인간과 계속 접촉을 하게 되는데 보통 백은 묘속에서 3년간의 제사를 받고, 귀는 집안에 존재하면서 자손 4대의 제사를 받으면 만족하여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백과 귀가 정당한 조의를 받지 못하거나 질병, 또는 살해당하거나 모함등으로 사형을 당한 자등의 경우는 그 원한으로 백과 귀의 기가 응결해서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과 벌레등의 생물이 귀신으로 변하는 것은 그 수령이 높은 경우와 사람과 접촉이 많은 것, 혹은 이것에 고통을 준 경우 등으로 그 정기가 응결해서 일종의 '저주'를 미치는 힘이 있는 귀신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귀신에 대한 이론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여러가지로 분분하지만 지금 얘기한 부분들은 대체로 일치하는 사항들입니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내내 해일은 차속에서 야릇한 흥분과 설레임으로 들떠있었다. 어쩌면 의식속에서만 존재하던 귀신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온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때 사람들이 놀라고 경악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엑셀에 올려진 그의 발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방송국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이번 다큐의 책임 프로듀서인 양희열 국장이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제작하고 싶다고? 그건 안돼, 3일후면 방송인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산에서부터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생긴다는거 정pd도 잘 알잖아! 만족스럽진 않지만 저번에 시사했을때도 큰 문제는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래?"
"부탁입니다, 국장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요"
"나참, 그래, 도대체 이유가 뭔가? 완성된 프로그램을 다시 제작하겠다는 이유가. 꼭 그래야만할 이유가 있다면 나도 한번 생각해 보지"
"진짜 귀신의 존재를 화면에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소 들떠 있는듯한 해일의 말을 들은 양국장의 눈이 커졌다.
"귀신을 화면에 담을 수 있다고 했나, 방금?"
"예, 분명히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 이봐, 정pd!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소릴 하는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이긴 하지만 이미 귀신의 모습이 담긴 테잎을 확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그 곳에 가서 취재를 해 보고 싶습니다"
"이미 테잎이 있다고?"
양국장이 놀라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찬찬히 해일을 바라보았다. 평소 성격이 좀 급하긴 하지만 결코 허튼 소릴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의자를 뒤로 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양국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반드시 귀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해.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말로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거야. 자세한 기획서를 새로 올리라구. 필요한 모든 장비와 인원은 적극 지원해 줄테니까. 하지만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자네나 나나 시말서 쓸 각오는 해야할거야"
* * *
강원도 횡성 경찰서의 윤혜경 형사가 국립 과학수사 연구소로부터 시신의 부검 결과를 통보 받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예상대로 시체 두 구의 사인은 늑대과에 속하는 짐승의 습격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구의 시체 검시 보고서를 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서에는 직접적인 사인으로 작용한 흉기가 죽창과 같은 긴 구멍이 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계속해서 시신은 모두 열 세번의 가격을 받았으며 범인은 열 세 번의 가격이 모두 완벽하게 몸을 관통하게 할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짧은 숏커트 머리를 크게 한번 흔들었다. 아무리 앞뒤를 맞춰 보려고 해도 미심쩍은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같은 일행 세명이 한 사람은 죽창에 의해, 나머지 두 사람은 짐승의 습격에 의해 거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다시 처음 시신을 발견 했을때 찍어 놓은 사진들을 들여 다 보았다. 짐승의 습격을 받았다는 두 구의 시체는 흉가라고 불리는 기와집의 뒤편 언덕에서 약 20여미터 간격으로 발견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구의 시체는 바로 그 흉가의 앞마당에 마치 처형을 받은 것처럼 사지를 벌린채 놓여 있었다.
"이봐, 윤형사! 내가 지금 자기 생각을 한번 맞춰볼까?"
낯선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 구희열 반장이었다. 이제 막 오십대에 접어든 그는 이 곳 h군에서 만 20년 이상 근무한 토박이였다. 하지만 혜경의 판단으로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무능한 부패경찰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혜경의 눈에 비친 대부분의 그의 모습은 전자에 가까웠다.
"자기 지금..... 마구 가슴이 뛰고 전에 없던 의욕이 마구 마구 샘솟지?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범이 어디선가 당신과의 게임을 기다리며 또 다른 살인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지? 그리고 자기만이 그 살인범을 잡을 수 있는 영화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고 말야. 어때 내 말이 틀렸어?"
그는 마치 자신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등뒤로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위에 한 손을 걸치며 말했다.
"다 이해해! 나도 경찰 초년병 시절엔 말야. 희대의 연쇄 살인범 나타나기만 손 꼽아 기다렸다구. 미궁에 빠진 사건, 영원한 미스테리..... 이 얼마나 멋지고 스릴 넘치는 일이냔 말야. 모든 경찰들이 다 해결하지 못해도.....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그 조그만 단서. 그걸 바로 나만이 찾아서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어때?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바뜨, 그러나! 그게 바로 모든 경찰 초년병들이 한번씩 걸리는 자아도취 내지는 구제불능이라는 병이라 이거야. 그러니 좋게 말할때 괜히 엉뚱한 데 신경쓰지 말고 자기 본연의 임무나 열심히 하란 말야"
"반장님! 이건 우리 관내에서 발생한 사건이예요"
"알아, 알아! 하지만 어제 서울에서 내놓라 하는 형사분들이 이미 조사해 갔잖아. 그런 골치 아픈 강력 사건은 서울에 잘난 분들한테 맡겨두고 우린 그저 곁에서 협조나 잘 해주면 되는거야, 알겠어? 막말로 우리가 충분한 예산이 있어, 인원이 있어? 그저 대충 수사하는 시늉만 보여주면 그만이라구, 알겠어? 그리고 꿈자리 사납게 그런 사진은 뭐하러 자꾸 들여 다
봐, 젊은 처녀가? 어서 치워!"
"반장님!"
"그래, 알았어. 또 처녀라는 소리 했다고 기분 상한다 이거지? 그래 미안해, 미안! 그리고 나 관내 순시 좀 다녀 올테니까 쓸데없이 싸돌아 다니지 말고 자리 지켜, 알았지?"
쳐다보지도 않은채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붓곤 유유히 사라지는 구반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혜경은 그야말로 가슴에 불이라도 나는 기분이었다. 구반장의 말대로 그녀는 올해 초 경찰 학교를 졸업한 스물 넷의 경찰 초년병이었다. 우수한 졸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이 곳 횡성 경찰서를 자원한 이유는 이 곳이 바로 그녀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윤형사님, 참으세요. 구반장님 원래 그렇잖아요"
그녀를 위로한 것은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올해 초 고동학교를 졸업한 후 경찰에 입문한 박호철 순경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군을 면제받은 대신 그가 택한 직업이 경찰이었던 것이다. 그는 윤형사를 누나처럼 따르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도 이번 사건은 뭔가 이상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아무리 서울에서 형사들이 다녀 갔다지만 우리만큼 이 곳 사정에 밝겠어요? 열심히 해보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까. 우리 관내에서 생긴 사건을 우리가 모른 척 할 순 없잖아요"
그의 따스한 말을 듣고 나니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박순경, 고마워. 나도 성질이 워낙 지랄 같아서 오늘처럼 반장님한테 스팀받으면 정말 참기 어렵더라구. 나 답답해서 좀 나갔다 올께"
"현장 다녀 오려구요?"
혜경은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였다.
2. 귀신이 찍힌 테잎(2)
사건 현장은 경찰서에서도 1시간이상 떨어져 있었다. 목촌리 321번지에서 332번지까지가 사건 현장 부근이었고 332번지가 바로 그 흉가라 불리는 기와집이었다. 번지수로 보면 총 13가구가 살고 있어야 하지만 그 곳에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가구는 단 세가구 뿐이었다. 이미 사건현장에서 그들을 모두 보긴 했지만 그녀가 직접 얘기를 나눠볼 기회는 없었다. 그들에 대한 조사는 구반장이 했었다. 그녀는 이미 그 세가구에 사는 주민들의 인적사항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산골에서나 그렇듯이 그들 중 오십대 이하의 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주민들을 탐문 수사해야 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한가지였다.
사망자들의 시신이나 정황으로 미루어 상당한 반항의 흔적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500여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목격자나 이상한 소리조차 들은 사람이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은 강원도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만큼 산골이었기 때문에 한번 걸음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낮이라 해도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울창한 숲을 30여분을 들어가야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만약 이곳 출신이 아니었다면 결코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그녀가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를 조금 넘겨서였다. 마을이라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보기 흉한 폐가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어느 구석에도 사람이 산다고 믿겨질만한 생기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죽은 마을. 그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321번지. 김명신(남자, 57세). 그녀는 자신이 적어 온 자료를 다시 읽고서 집으로 들어 섰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민 모두가 약초를 캐서 생계를 유 지하기 때문에 낮엔 집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325번지. 321번지와는 약 50여미터 떨어져 있었다. 한만수(남자, 65세), 한정우(남자, 72세). 그들은 형제였다. 역시 그들도 집에 없었다. 남은 한 집은 329번지였다.
사건 현장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집이었다. 권향미(여자, 92세), 김운기(남자, 69세). 그들은 모자였다. 집의 뒷쪽으론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만 넘으면 기와집이 있는 사건 현장이었다. 마당에는 각종 약초를 다듬은 듯 한 흔적과 뗄 나무들이 한켠에 쌓여 있 었다. 그녀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마지막 집마저 아무도 없다면 어려운 걸음을 헛탕칠 것 같아 내심 초조하던 혜경이었다. 대답이 없어 그녀가 조심스럽게 방문 앞으로 다가가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찰나 방문이 왈칵 열렸다. 그녀는 얼떨결에 두어걸음 물러섰다. 방에서 고개를 내민 노인이 권향미라는 것을 그녀는 금새 짐작할 수 있었다. 팔다리가 꼬챙이처럼 앙상한 뼈만 남은 노인. 눈밑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완연한 노인이 쿨럭거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아무도 안 계신줄 알고..... 저 아시죠? 몇 일전 고개넘어 기와집에서 보셨잖아요. 전 횡성에서 온 경찰이예요"
그러나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는 혹시 할머니가 귀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어 발자욱 다가가서 좀 더 큰소리로 소리치려할 때였다. 갑자기 노인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딜 다가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두어 발자욱 물러났다. 노인은 더욱 적대적인 눈길로 그녀를 노려 보았다.
"할머니, 뭔가 오해를 하셨나본데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번 살인사 건 조사차 나온 경찰이예요.제 말 잘 들리세요?"
"그럼, 내가 귀머거린줄 알았어?"
"그런 뜻이 아니구요. 그럼, 제가 그냥 여기 서서 몇가지만 물어 볼께요. 아시는대로 대답을 좀 해주세요"
"난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구!"
"할머니 그러지 마시고 협조를 좀....."
그때였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건. 갑자기 노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방안의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른다고 했잖아, 어서 꺼져버려, 망할 것! 괜히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간 너도 무서운 일을 당할 줄 알아. 어서 꺼져!"
말을 마친 노인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 버렸다. 혜경으로선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인을 상대로 더이상 뭔가를 물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이왕 온 김에 현장을 한번 더 둘러 봐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녀는 천천히 집 뒷쪽으로 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양 옆으로 수 백년은 된 듯한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었고 가끔씩 들려오는 산새 소리들은 평화롭게만 여겨졌다. 그녀가 고개 정상에 닿았을 때 아래로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332번지. 그 집의 소유는 김학봉(59세, 남자)이라는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집을 비운지가 얼마나 되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수십년 이상을 비워둔 것처럼 집은 앙상한 뼈대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마을에서 현장까지 그녀가 재어본 시간으로는 느린 걸음으로도 6, 7분이면 충분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집앞 마당엔 무수한 이름모를 들꽃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몇일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도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엔 핏빛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하던 광경이 되살아 나는 듯 해서 그녀는 약간의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집 주위를 돌면서 사망자들의 시신이 놓여 있던 곳을 둘러보았다. 국과수에서 보내온 피해자들의 사망 추정 시간은 새벽 5시경. 그녀는 다시 집의 앞마당으로 돌아와 집앞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리곤 집을 올려 다 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집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순간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냉기를 느꼈다. 집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노려 보고 있었다. 왼편 부엌의 반쯤 떨어져 나간 문짝이 이따금씩 기분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그날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녀가 눈을 감자 참혹하게 죽은 시신들의 끔직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 공포에 질린 눈동자들. 그들이 질러대던 끔찍한 비명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살려 달라는 그들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쳤다. 그녀가 눈을 뜨고 올려다 본 곳엔 어디선가 본 듯한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왼쪽 뺨엔 칼자욱이 선명하고 눈자위는 움푹하게 들어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느낌. 한만수. 325번지에 사는 형제중 동생되는 자였다. 그는 어깨에 망을 메고 있었고 그 망 사이로 삐죽 삐죽 약초처럼 보이는 풀뿌리들이 삐져 나와 있었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시종 불안한듯 좌우로 굴러 다녔다.
"한만수씨, 맞죠?"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간신히 물었다. 그는 대꾸없이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 알아 보시겠죠? 이번 살인사건 때문에 수사차 나왔습니다. 댁에 들렸는데 안 계시더군요"
자신의 집에 들렸다는 혜경의 말에 사내는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날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셨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그 일이라면 난 더이상 할 말이 없어. 여긴 너같은 계집이 올 데가 못 돼. 쓸데없는 짓 말고 어서 돌아가!"
사내는 마치 그녀를 동네 여자애 다루듯 거칠게 말했다.
"이봐요, 한만수씨! 전 지금 공무를 수행하는 형삽니다. 당신은 제게 협조를 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의무? 난 그런거 모르니까 잡아가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그리고 경고 하지만 이곳에 함부로 오지 않는게 좋을거야"
사내는 마치 위협하듯 재빠르게 말하곤 무엇에 쫓기듯 동을 돌려 고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봐요, 한만수씨!"
그녀가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그는 더이상 뒤돌아 보지 않았다. 사내의 표정은 뭔가에 잔뜩 겁을 먹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아까 그녀가 만났던 권향미 할머니, 그리고 이번엔 한만수라는 사내. 그녀는 그들이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쥐죽은듯 고요한 산골에서 그 끔찍한 비명소리를 한 사람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녀가 만난 두사람 모두에게서 그녀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두사람과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뇌리에는 이상하게도 줄곧 죽음 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은 이 기와집을 비롯한 마을 전체로 부터 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서늘한 냉기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2. 귀신이 찍힌 테잎(3)
비디오 테잎을 보고난후 김익재 촬영감독과 조연출 안영우는 몹시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익재 촬영 감독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것들이 정말 귀신이다, 이거야?"
"한국대학 손남의 박사 얘기니까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그러자 김감독이 갑자기 자신의 소매를 걷어 걷고선 안영우에게 말했다.
"야, 영우야, 내 팔 좀 만져봐라. 소름 돋은거 보이지?"
김감독의 말에 이영우도 양팔을 어루만지며 맞장구를 쳤다.
"저도 웬지 오싹 오싹해지는게 기분이 이상한데요?"
김감독 또한 테잎을 보며 카메라 이상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래서..... 정pd 얘기는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자 이거요?"
"아닙니다. 전체를 모두 다시 만들잔 얘기는 아니고 후반부만 다시 만들어서 결론을 바꾸자 이거죠. 우리가 과연 저곳에 가서 똑같이 귀신을 찍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설사 못 찍어도 저 테잎이 있으니까 후반부는 수정할 수 있다는 거죠"
김감독이 다시 화면을 한번 바라보곤 이영우에게 말했다.
"야, 미치겠네! 올해는 완전히 귀신 붙은 해라더니, 그 점쟁이 얘기가 꼭 맞네, 꼭 맞아! 영우야, 담배 있으면 한대만 주라!"
"또요? 오늘 벌서 몇 개핀줄 알아요? 좀 사서 피세요. 사서!"
이영우가 마지못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개피를 건네자 김감독이 또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임마, 내가 뭐 담배 살 돈이 아까워서 그러냐? 담배 좀 줄여 보겠다는 내 마지막 몸부림을 넌 그렇게 이해 못하겠냐? 내가 담배 사 봐라. 하루에 두갑은 필거다. 근데 너한테 맨날 이런 구박 받으며 빌려 피니까 하루에 열개피는 안 넘잖냐? 그리고 얼마후면 어느 귀신한테 잡혀갈지 모르는 판국에 동지끼리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마라"
"아이구, 됐어요, 됐어!"
둘은 언제나 앙숙이었다. 촬영장에 가서도 토닥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촬영 때는 술 한잔 안 걸치면 작품이 안 나온다며 틈만 나면 술 먹자는 김감독과 절대 음주촬영은 묵과할 수 없다며 술이라면 입에도 못대는 이영우. 그들은 정민수와 벌써 2년째 같이 작품을 하는 호흡이 잘 맞는 스텝들이었다. 정민수와 함께 그들은 올 가을 내내 귀신만을 찾아 다녔다. 나중에
는 스텝들이 모두 악몽에 시달린다며 비명을 지르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정말 귀신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내심 흥분되기 시작했다. 촬영일은 4일후로 잡았다. 대략적인 스텝회의를 마치고 해일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새벽 1시경이었다.
그가 아파트를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심야에 걸려오는 전화는 두가지중 하나였다. 몹시 급한 일이거나 불길한 일이거나.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던지듯 쇼파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해.... 해일이냐? 나.... 한수야, 김한수!"
"어? 웬일이냐,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디야, 편집실?"
"아.... 아니, 집!"
"집? 제수씨가 좋아 하겠군, 근데 무슨 일로?"
"뭐.... 특별히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이 자식이.... 지금 노총각 약 올리는거야, 뭐야? 집에 들어 갔으면 제수씨 껴안고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웬 전화질이야. 왜, 오랜만에 집에 들어 가니까 남의 집 온거 같아 잠이 안와?"
"그게.... 아니고..... 너..... 그 흉가 촬영 하기로 했냐?"
"그래, 덕분에, 잘 하면 한방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일 잘 되면 내가 한 잔 살께"
"그.... 그래, 그랬구나"
"근데 너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어디 아프냐?"
그제서야 해일은 김한수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으며 어찌 들으면 떨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 아니야,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애. 근데, 저기 말이야...."
"그래, 얘기해"
"아.... 아니야, 됐어"
"임마,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니야, 그냥 술 생각 나서 전화 했는데 그만 두는게 좋겠어"
"짜식 싱겁긴, 그래, 괜히 감기 걸려서 술 먹었다가 더 고생하지 말고 일찍 자라. 제수씨 걱정 하겠다"
"그래.... 너도 몸조심 하고.... 이만 끊을께"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해일이 다소 싱거운 그의 전화에 한번 피식 웃곤 막 웃옷을 벗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낯설게 다가섰다. 그래, 너도 몸조심 하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인삿말이 아닐 수 없
었다. 그리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짜식, 감기에 걸리더니 정신까지 오락 가락하나?"
* * *
전화를 끊은 김한수는 거실 쇼파에 넋나간 사람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두운 정적속에서 불규칙한 숨소리가 규칙적인 시계초침 소리에 묻혀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있던 김한수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곤 발작적으
로 거실의 불을 있는대로 밝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조각나고 거실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불빛에 드러난 김한수의 모습은 더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얼굴엔 식은 땀이 번질거렸고 몇 일째 잠을 못 잔 사람마냥 두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밝은 빛이 가득한 거실을 좌우로 서성이기 시작했고 그의 입에선 알 수 없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빌어먹을 그럴리 없어, 현실이 아냐. 절대로"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던그가 이번엔 갑자기 주방으로 다가가 장식장을 열곤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거칠게 병마개를 따서 컵에 술을 가득 부었다.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는 또다시 컵에 술을 채웠다. 역시 이번에도 순식간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은 안정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쌀 때 였다.
"여보!"
낯선 소리에 그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내 지윤이었다. 그는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실 불을 뭐 하러 있는대로 켰어요?"
지윤이 막 거실불들을 끄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김한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끄지마!"
그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지윤이 흠칫 놀라며 얼어붙듯 그 자리에 섰다.
"여.... 여보!"
"거실 불.... 끄지 말라구!"
한동안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 왜 그래요?"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당신, 어디.... 아파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남편의 고개를 들어 올리던 그녀의 표정이 일순 하얗게 변했다.
핏발 선 두 눈. 신경질적이고 창백한 얼굴. 섬뜩한 광기. 지윤은 지금까지 한번도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 정력적이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여보... 당신?"
그러자 김한수가 그녀의 손을 훽 뿌리치며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날 보지마!"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고개 돌린 김한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머리와 얼굴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왜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채 김한수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조금씩 흐느낌이 새어 나왔고 남편의 어깨가 약간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의 옆에 주저앉아 남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편의 얼굴을
본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엾게도 남편은 울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울먹이듯 말했다.
"당신 왜 그래요?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요. 제발, 여보!"
남편이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다음 얘기는 그녀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여.... 여보, 나.... 너무.... 무서워"
"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기랄! 여보. 나... 무서워 죽겠어!"
마침내 남편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애원하듯 소리쳤다.
"잠을.... 잠을 잘 수가 없어.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여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남편의 온 몸은 그녀가 부둥켜 안기에도 벅찰 만큼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섭다니. 아득한 현기증이 그녀에게 찾아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불이 환히 밝혀진 거실을 둘러 보았다. 거실은 조금도 달라 진 것이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간힘을 쓰면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지키겠다고.
3. 몇 가지 의문들(1)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석연치 않은 태도는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직까지 뚜렷한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한 혜경이었다. 단서를 못 잡고 헤매긴 서울에서 내려왔던 시경 수사팀들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가끔씩 전화를 해선 이미 보내준 사진 자료들을 다시 한번 보내 달라거나 사건 현장 부근에 늑대과에 속하는 짐승의 서식 여부에 대한 자료 조사 요청 정도였다.
그들은 아무래도 피살자 세명의 원한 관계에 의한 계획된 살인으로 촛점을 맞추고 그들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다. 그녀가 조사해본 바 로는 최근 5년간 목촌리 부근에서 야생 늑대가 발견 되었다는 보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혹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흉기가 죽창이라는 점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금방 남의 눈에 띌 수도 있고 소지하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기에도 그것은 적당한 무기가 아니었다. 분명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가 어떤 식으로든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한가지 생각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서 식사를 하던 구반장이 놀란 토끼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윤형사가 밥을 다 마다 하고? 최근에 무슨 충격 받은 일 있어?"
"네?"
"아니, 내 말은 식사때 마다 꼬박 꼬박 두 그릇은 싹싹 비우던 자기가 밥을 남기길래 혹시 누구한테 충격받고 그 뭐냐, 남들이 하는 다이어트라도 하나 해서?"
"나참, 기가 막혀서.... 반장님은 왜 저만 보면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세요?"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라니? 내가 언제 자기 못 잡아 먹어서 안달 했다고 그래?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결코 날씬한 편은 아니잖아. 그래서 밥을 안 먹길래 다이어트 하냐고 물은건데.... 그게 뭐 그렇게 잘못 한 건가? 이봐 박순경,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실수한 거야?"
구반장은 짐짓 정색을 하며 옆에 있던 박순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어 보세요? 전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됐어요, 제가 참죠. 하지만 반장님, 그러시는거 아니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그래? 자기 정말 성격 이상하네?"
그때 그들 사이에 식당 아줌마가 끼어 들었다.
"오늘 또 사워요? 하옇튼 어떻게 반장님 하고 윤형사는 하루도 안 빼고 그렇게 티격 태격이예요, 그래? 그건, 그렇고 그 뭐냐.... 목촌리 살인사건은 어떻게 범인은 잡았어요?"
그러자 구반장이 갑자기 탁하고 숟가락을 내려 놓곤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줌마! 경찰도 사람이요, 사람! 남 식사하는데 꼭 그런걸 물어야 겠수? 아줌마는 밥 먹는데 똥 얘기하면 기분 좋아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 윤형사한테 물어봐요. 살인사건 아니면 상대 안 하는 형사니까"
구반장의 가시박힌 말에 혜경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요 몇 일 관내의 다른 일들을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구반장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모른 척 하고 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별로 좋지도 않은 상황에서 주책맞은 아줌마가 일부러 그 얘길 꺼내니 여간 난처한게 아니었다.
"아이구, 반장님두, 별것 다 갖고 토라지실까? 에게 식사도 벌써 다 하셨네, 뭐. 근데, 이번 사건 정말 윤형사 담당이야?"
"아.... 아니예요. 아줌마! 제가 무슨....."
"하긴, 서울에서 형사들이 내려 왔었다며? 어떤 미친놈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하긴 옛날부터 목촌리 그 곳이 터가 센 곳이었지. 반장님도 잘 아실걸요? 해방전엔 그 곳이 왜 전염병 환자들 격리하던 곳이었다잖아요. 그러더니 6. 25땐 빨갱이들 내려와서 반동분자들 공개 처형한다면서 죄 없는 마을 사람들 수 없이 끌어내선 죽창인가 뭔가로 마구 찔러 죽이는 바람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때 혜경의 의식 속을 번개처럼 파고 드는 단어가 있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아줌마! 방금 죽창이라고 하셨어요?"
"아이구,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윤형사?"
6.25, 공비, 죽창.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바보같이 한번도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이상하기까지 했다.
죽창이란 것이 지금은 몹시 낯설지만 불과 40여년전에는 한때 그것이 가장 무섭고 두려운 무기였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님, 저 먼저 일어설께요"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만약 오후에 또 자리 비우면 그땐 정말 가만 안 있을거야! 알았지?"
구반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귀엔 더이상 구반장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목촌리, 6. 25, 죽창, 공비, 공개 처형..... 그런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 * *
해일이 김한수의 아내인 지윤으로부터 급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그는 김한수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지윤과는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김한수의 학과 후배였고, 따라서 해일의 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들이나 동문회 같은 특별한 행사때 김한수와 같이 그녀를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는 것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겐 둘이 만나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당부를 따로 남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일 것 이라는 예감만이 막연하게 그의 머리를 떠돌 뿐 특별히 추측될만한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틀전 새벽에 걸려온 그의 전화가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당시엔 별 신경 않 쓰고 그냥 넘겼지만 아침에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나선 자꾸만 그때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커피숍은 한산한 편이었다. 그는 일부러 20분 정도 일찍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약속시간에 맞추어 나타났다.
해일은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불길한 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으며 서둘러 나왔는지 옷차림 역시 예전의 그녀와 달리 별로 신경을 쓴 기색이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해일의 앞에 마주 앉은 그녀의 모습은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몹시 망설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제수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그러자 마침내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바쁘신데 이렇게 만나자고 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긴 해야 겠는데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만나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요즘.... 그 이한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 상 한 일이라니요?"
"글쎄, 어디서 부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그 사람, 뭔가에 홀렸는지 예전의 그 이가 아니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때부터예요. 강원도에 살인사건인가, 취재를 갔다 온 그 다음부터...."
그녀는 감정이 복받치는지 거기서 말을 끊곤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음부터 이어진 그녀의 얘기들은 김한수를 잘 알고 있는 해일로 선 도저히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3. 몇가지 의문들(2)
그녀의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김한수가 강원도 h군의 취재를 갔다 와서 밤을 세워 기사를 쓰고 집으로 들어 온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고 한다. 그녀가 보기에 김한수는 그날따라 유독 지치고 피곤해 보였으며 집에 들어 오기가 무섭게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든 김한수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는 결혼 후 한번도 헛소리나 잠꼬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힘든 일때문에 몸이 약해져 그런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김한수의 잠꼬대는 매일 계속 되었고 그 정도도 심해졌다.
그리고 그 잠꼬대의 대부분은 살려 달라는 비명에 가까운 것이었고 급히 잠을 깨우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뭔가를 두려워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잠꼬대만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을때도 그는 이상하게 불안해 하고 초조해 했다. 그러다 바로 이틀전 해일과 통화를 한 바로 그 날밤엔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로 무섭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서 울음까지 터뜨렸다는 것이다. 해일은 참담한 기분으로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토록 활동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던 김한수가 그랬다는 것이 그로선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기가 막히더라구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하두 답답해서 방송국에 연락해 봤더니 갑자기 휴가를 내겠다고 했다더군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할 수 없이 전문의의 진단을 한번 받아보자고 했죠. 정pd님도 아시죠? 그 이 친구중에 정신과 전문의로 있는 민병기박사라고......"
"민박사요? 예, 압니다"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자기를 무슨 정신병자 취급하냐며 갑자기 집안의 물건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마치 딴사람처럼, 너무 무서웠어요. 그 이의 그런 모습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었거든요"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가 자신에게 테잎을 넘겨줄때만 해도 해일은 그에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전 그의 전화는 예사로운 전화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생각을 지배했다. 그는 분명 그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삭키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제가 놀라는 것이야 뭐 큰일인가요? 다만 그 이가 너무 걱정이 되서....."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그리곤 바로 어제 아침에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은 그 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이와 함께 h군에 취재 갔던 카메라맨이 갑자기 죽었다는 거예요. 그때 그 이의 표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 처럼 절망하고 좌절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한 것 같아요. 온 몸을 부들 부들 떨면서 알아 들을 수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더니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채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을 그토록 무섭게 만들 수 있는게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어요. 아무리 문을 열라고 해도 그이는 제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는 양 대답조차 하지 않았어요. 무섭고 두렵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우선 방문을 열어야 겠다는 생각에 창고에서 비상키를 찾아서 다시 돌아왔을땐 남편은 이미 나가고 없더군요.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했어요. 그들에게 자신은 미친것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하면서.... 저 보고..... 그동안 고마웠다면서..... 그이의 전화가 끊기고 얼마후 과연 경찰이라는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그 이를 찾았어요. 그리곤 그 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돌아가더군요. 그 후로 지금까지 그 이한테선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거예요. 도대체 그 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하고 조마 조마해서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 전 어쩌면 좋죠? 어떡해야 돼죠?"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눈빛으로 해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일이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김한수의 기이한 행동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를 찾아 왔다는 경찰들은 누구일까? 그는 지금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맴돌았다. 그는 일단 그녀를 최대한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자신이 어떻게든 원인을 알아 볼테니 참고 기다려 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긴 그녀와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한가지 그의 마음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김한수의 기이한 행동과 그가 취재를 갔던 h군의 살인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우선 김한수와 함께 취재를 갔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카메라맨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도국에 전화를 걸어 본 결과 그의 이름이 이창수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는 김익재 촬영감독에게 도움을 청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같은 방송국의 카메라맨이니까 서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뭐? 이창수가 죽었다구?"
예상대로 김감독은 이창수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사람과 잘 아세요?"
"잘 알 다 뿐이요? 옛날에 내 밑에서 카메라 배워서 입봉한 녀석인데... 이제 갓 서른밖에 안됐는데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죽었답디까?"
"저도 확실한건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집에서 죽어 있는 것을 우연히 그의 집에 들른 친척이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더군요"
"참, 사람 목숨 별거 아니구만. 한 보름전에 만났을때만 해도 멀쩡하던 놈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해일과 김감독이 이창수의 집 앞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경찰들이 '수사중' 이라고 쓴 팻말이 달린 노란 띠를 집 주위에 둘루곤 사람들의 집안 출입을 통제한채 삼엄한 경계를 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김감독이 말했다.
"이거, 그냥 죽은게 아닌 모양인데? 웬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해?"
김감독과 해일이 다가가자 근무를 서던 경찰이 앞을 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여긴 현재 일반인 출입이 금지 된 곳입니다"
그러자 그 경찰에게 김감독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이보슈, 난 죽은 이창수완 아주 막연한 사인데 도대체 왜 죽었습니까? 죽은 이유나 좀 압시다"
"수사상 비밀이라 현재로선 아무것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해 줄 수 없단 말이오?"
"그만 물러나세요, 상부에 지십니다"
경찰이 김감독과 해일을 밀치듯 제지하자 김감독이 화가 난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항의했다.
"나원 참, 분통 터져서. 무슨 놈의 민주 경찰이 이 따위야. 아끼던 후배가 죽었는데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알 수 가 없단 말야?"
삿대질까지 해대며 분통을 터뜨리는 김감독을 가까스로 말린 것은 해일이었다. 공연희 소란을 피워봤자 아무것도 얻어질건 없을 것 같았다. 난감한 심정으로 이창수의 집만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해일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한수와 보도국에 함께 있는 강상준 기자였다. 잘 알진 못하지만 해일이 김한수와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pd님, 아니세요?"
"아예, 강기자님이시죠?"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예, 뭣 좀 알아볼게 있어서요. 강기자님은 어떻게?"
"예, 저는 취재차 조문차, 겸사 겸사 나왔습니다. 저희 보도국에 있던 카메라맨 한 명이 죽었거든요"
"사실 저도 이창수라는 사람의 죽음이 궁금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혹시 아는게 있으시면 좀....."
"그 사람과 아시는 사이 셨던가요?"
그때 김감독이 나섰다.
"창수와는 제가 잘 압니다. 대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러자 강기자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잠시 난색을 표명했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사실 저도 같은 직장 동료의 죽음을 취재한다는게 여간 찝찝한게 아닙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취재를 할 수가 없었어요. 경찰 측에서 전혀 접근을 안 시켜 주는 겁니다. 웬만해서 그런 일이 없는데...... 현재로선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정보나 사실도 철저히 차단되고 있어요. 다만 제 정보원을 통해 어렵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의 시체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 을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거예요"
"손상이 됐다구요?"
해일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한마디로 무슨 맹수에게 뜯어 먹힌 것 같았대요. 방안이 온통 핏자욱 이었는데 거세게 저항한 흔적도 역력하고..... 하옇튼 너무나 끔찍한 모습이었대요"
그러자 이번엔 김감독이 큰소리로 말했다.
"맹수한테 뜯어 먹혀요? 여기 자기 집에서?"
"네. 경찰도 그 점을 수상히 여기나 보더라구요.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자신의 집에서.... 때 아닌 맹수라니. 그리고 더욱 이상한 점은 살해된 모습이 이창수가 죽기 전 김한수 기자와 함께 취재를 다녀온 강원도 h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피살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다는 겁니다"
강기자의 얘기에 해일은 심한 혼란을 느꼈다. 강기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해일 역시 자연스럽게 그 h군 살인사건을 떠올렸던 것이다. 김한수가 너무나 끔찍했다며 치를 떨며 넘겨준 그의 자료들에도 그 피살자들의 시신에 대한 여러 의문점과 묘사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h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이창수라는 카메라맨과 무슨 관련이 있길래. 그리고 김한수와는 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의문점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정pd님, 어제, 오늘 사이 혹시 김한수 기자 보지 못 했어요?"
"김기자요? 아니요, 왜요?"
"뭐, 별건 아니고 경찰에서 김기자를 좀 만났으면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h군에 이창수와 함께 다녀 왔으니까 혹시 짚이는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그 사람 몇일전 휴가 내곤 전혀 연락이 안 되더라구요. 집에 전화해도 전화도 않 받고"
"글세요, 저도 최근에 김기자를 만나지 못해서. 만약 만나면 그렇게 전하죠"
강기자가 가고 나자 김감독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정pd. 이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h군 살인사건은 나도 뉴스에서 봤는데 이창수가 그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니, 이게 말이 되요? 정말 거기 귀신이라도 있는거 아닐까?"
"그거야 뭐, 직접 가보면 알겠죠"
"난 어째 이번엔 웬지 기분이 뒤숭숭한게.... 아무래도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 놓고 가야 할 건가봐?"
"김감독님 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말은 쉽게 했지만 해일의 머릿속도 개운치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엔 내내 김한수가 마음에 걸렸다. 이창수의 죽음이 김한수에게도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3. 몇가지 의문들(3)
h군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십여권의 책더미를 쌓아놓고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이었다. 한참을 자료들을 살피던 박호철이 몸을 뒤로 젖혀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윤형사님, 오늘은 이만 하죠. 전 눈이 아파서 더이상 못 하겠어요. 그리고 지금쯤 반장님이 돌아오실 때도 됐고. 반장님이 알면 또 난리날 텐데"
"미안해, 박순경까지 고생하게 해서....그래, 오늘은 이쯤 하자구"
"그런 소리 마세요. 근데 목촌리 마을과 주민들에 대해 이렇게 조사하는 이유가 뭐죠? 이것들이 살인사건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찾은 자료들 복사하고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좀 더 분석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혜경과 박호철이 가슴에 하나 가득 자료들을 안고서 도서관을 나온 것은 이미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구회열 반장이 오늘 집안 일때문에 오후 늦게나 잠깐 경찰서에 들린다는 소릴 듣고 그녀가 박순경에게 부탁하여 함께 도서관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 갔을때는 벌써 구회열 반장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잠깐 나 좀 보자구!"
구반장은 손에 잔뜩 서류더미들을 들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해선 회의실로 그들을 불렀다. 혜경은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구반장을 따라 갔다. 회의실에 앉은 세 사람 사이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구반장은 손에 든 볼펜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리며 두 사람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참다못한 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반장님.... 오늘 근무 시간에 자리 지키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해요"
"죄송한게 그게 다야?"
"박순경 데리고 나간 것도....."
"그리고 또?"
"........."
그녀가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이자 구반장이 자신이 들고 들어온 종이 뭉치들을 탁자위에 팽개치듯 던지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다 뭐야?"
구반장의 말에 혜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모두가 팩스들이었다. 혜경이 서울 시경 자료실에 있는 경찰학교 선배에게 부탁 하여 받은 목촌리 출신 주민들에 대한 신상 기록들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오늘 경찰서 팩스가 완전히 마비됐어, 알아? 다른 급한 팩스가 하나도 못 들어와서 난리가 났었단 말야! 너, 나 아주 목 짤리게 만들려고 작정햇냐, 작성했어?"
구반장의 벽력같은 소리에 박호철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으로 변했다. 가슴이 철렁한 것으로 말하자면 혜경쪽이 훨씬 더 했다. 선배가 보내 주기 로 했던 자료가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어디 한번 내가 납득하게 설명을 해 봐, 이것들이 다 뭔지"
구반장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마침내 결심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장님, 이번 사건을 제가 정식으로 수사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그리고 반장님께서도 절 좀 도와 주십시요. 이번 사건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 일입니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구반장이 기가 막히는 표정으로 그녀를 잠 시 바라보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하고 내 리치며 소릴 질렀다.
"그건 안될 말이야. 안된다구, 절대! 안돼!"
혜경 또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선 더 세게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상부에서도 계속 시경팀을 도와 수사에 협조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분명히 우리 관할내에서 일어난 우리 일인데 왜 안되요, 왜요? 겁나세요? 무서우세요?"
그러자 이번엔 구반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붉게 상기된 얼굴을 실룩거리며 혜경을 향해 다가왔다. 박호철이 말릴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상황은 더욱 험악한 분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쬐끄만게 이쁘다 이쁘다 하니깐 정말 끝도 없이 기어올라!"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듯 한 기세로 노려보자 혜경도 질세라 두 눈을 똑바로 뜨며 대들 듯 가슴을 내밀었다.
"저도 더이상은 못 참겠어요. 상관이면 다 예요? 근무 태만에다, 유흥업소 단속은 커녕 돈 받고 봐주기나 하고.... 제가 다 모를 줄 알아요? 경찰 옷만 입으면 다 경찰이예요?"
그녀의 말에 구반장이 부들 부들 떨면서 박호철을 향해 더듬거렸다.
"야, 바.... 박순경아, 지... 지금 윤형사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더듬거리며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구반장을 향해 혜경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 상관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예전에 제 주먹이 가만 있지 않았을 거예요"
"유.... 윤형사님!"
박호철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도 구반장은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곤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왜요? 양심에 찔리시나요? 더 얘기해 드릴까요?"
혜경이 여전히 소릴 지르면서 험악한 기세로 노려보자 구반장이 손을 내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너 잘 났다, 너 잘 난거 아니깐 제발 살살 좀 얘기해라. 귀창 터지겠다. 애가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야, 박순경 아, 문 열고 이 여자 얘기 혹시 들은 사람 없나 한번 봐라. 아이구 어지러워, 아이구 머리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박호철이 구반장의 말대로 회의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살피곤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확실하냐?"
"네"
"제....제..... 갑자기 왜 저 여자 이름이 생각이 않 나냐?"
박호철이 얼른 대답했다.
"윤형사님요, 윤형사"
"그래.... 윤형사, 박순경아, 나 오늘 제 때문에 여러 번 숨넘어갈 뻔 한다. 도대체 윤형사가 뭘 믿고 내가 돈 받고 봐주기 했다는건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박순경아, 넌 이해가냐?"
"그럼, 제가 직접 증거를 들어 보일까요? 아니면 증인이 필요 하세요?"
"그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리 서로 흥분하지 말고 차근 차근 말로 풀자구. 내가 뭐, 특별히 뒤가 캥긴다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돼. 다만, 정 윤형사가 그 사건을 그렇게 수사 하고 싶으면..... 하라 이거야. 난 단지, 그런 험한 사건에 윤형사 같은 연약한 여자를, 아니, 연약한 여자란 말은 취소하고..... 하옇튼 부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평양 감사도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는 거지. 그럼, 더이상 할 말 없지? 난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만 좀 퇴..... 퇴근할 테니까 퇴근 하려면 하고, 남아서 일들 하려면 하라구. 구....굿나잇!"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회의실을 나가자 박호철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혜경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윤형사님, 정말 대단 하시네요? 저 같으면 꿈도 못 꿀텐데.... 근데 반장 님이 정말 돈 받고 봐 주기 했다는 거 사실이예요?"
"그거야 박순경이 알아서 판단 하라구. 난 집에 가서 자료들 좀 더 뒤져봐야 겠어"
혜경은 회의 탁자에 흩어져 있는 팩스 자료들을 주섬 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 심하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이번 사건에 매달리게 되는지 자신도 명확히 알진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목촌리 사건의 이면에는 베일에 가려진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도서관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목촌리에서 일어난 괴이한 살인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4.. 죽음의 마을(1)
마침내 촬영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해일은 자신의 아파트 거실에서 이번 촬영에 투입될 스텝과 장비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해 보았다. 스텝은 조연출, 스크립터, 촬영감독과 보조, 적외선 카메라맨, 스틸 사진 기사 그리고 출연진으로 그간 계속 자문 역할을 해온 한국 기공 협회 회장 오윤창씨, 무속인 이정란씨등 무속 전문가 2명과 자신을 포함하여 총 9명으로 확정지었다.
촬영 스케쥴은 일단 내일 목촌리 흉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밤샘 촬영을 한 다음 모레 서울로 올라와 촬영 테잎을 분석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이틀 더 촬영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이번 촬영에 임하는 그의 마음가짐은 분명 여느 때와 달랐다. 특히 이창수의 사망과 김한수의 괴이한 행동에 이은 실종은 그를 알 수 없는 긴장속으로 몰아넣었다. 잠을 자려고 벌써 2시간째 눈을 붙이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의식은 더욱 또렷해져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에 불을 밝혔다.
시간은 이미 새벽 3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잠자긴 틀린 것 같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무엇을 하며 이 시간을 보낼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러나 잠시후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허탈한 공허감이었다. 이럴때 따스한 말 한마디 같이 나눌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는 비로소 혼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적막하고 고독한 일인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이번 촬영이 끝나면 시골 부모님의 말대로 선이라도 봐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날카로운 비수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해일은 전화를 받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이 김한수의 전화일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졌다. 그는 잠시 전화를 노려보다 거칠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뜻밖에도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것은 섬뜩한 울음소리였다. 뭔가에 쫓기는 듯 다급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
"여보세요? 한수냐? 너 한수 맞지?"
"살..... 려...... 줘, 제발!"
흐느낌 속에서 간신히 짜내는듯한 목소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 목소리는 분명 김한수의 목소리였다. 해일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수야, 임마! 거기 어디야? 내가 갈께,거기 어디야?"
대답 대신 흐느낌이 이어지던 수화기 건너편에서 다시 부들 부들 떨리는 김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난 살고 싶어, 금방 놈들이 쫓아 올거야. 믿을 수가 없어,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누가, 대체 누가 쫓아 온다는 거야?"
"끔찍한 괴물들.....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어..... 어디에도..... 나.... 난.... 도망갈 수 없다구"
"진정하고 차근 차근 말해봐, 알아 듣게"
"해.... 해일아, 그.... 그 곳에 가지마. 흉가에 가선 안돼!"
"한수야! 이러지 말고 우리 만나서 얘기 하자.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와.... 왔어..... 무.... 무서워, 놈들이야! 안개가 보이면..... 알 수 있어. 해일아..... 난 살고 싶어, 해일아..... 아악!"
"한수야, 무슨 일이야? 한수야! 한수야!"
그러나 김한수는 이미 수화기를 놓쳐버린 모양이었다. 대신 수화기 먼 곳으로부터 끔찍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든 해일의 손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김한수의 소름 끼치는 절규가 해일의 의식을 찢으며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더.... 덤벼봐, 이 더러운 새끼들아, 어서..... 어서 덤비란 말얏! 내가 네놈들을 겁내는 것 같애? 뭘 기다리는 거야? 어서 덤비란...... 악.... 아악!"
수화기를 움켜진채 해일은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어깨가 무섭도록 떨리고 있었다. 해일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선 계속해서 처참한 김한수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수화기에선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해일은 결코 수화기를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이 김한수와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김한수의 시체가 발견된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의 시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도심 뒷골목 쓰레기 더미속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 되었다. 오열하는 지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해일은 가슴팍을 파고드는 서늘한 냉기를 느껴야만 했다. 김한수의 마지막 비명이 지금도 그의 귓전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비명 너머로 형체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조금씩 해일의 심장을 죄어 오고 있었다. 촬영일은 하루 더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흉가에 가지 말라던 김한수의 마지막 말이 그의 마음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 * *
혜경의 자취방엔 온갖 잡다한 서류들이 하나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서류들은 제각기 일정한 규칙으로 나열되고 분류되어 있었다. 벌써 새벽 5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밤새 정리한 자신의 노트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갖가지 숫자와 도표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숫자와 도표들을 하나 하나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녀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금껏 노트에 정리한 것들은 말하자면 목촌리 마을의 내력, 그 중에서도 특히 6. 25 이후 목촌리에 거주했던 주민 신상에 대한 것 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목촌리 부근 지방의 역사지, 지리지, 각종 신문 자료, 서울에서 선배가 보내준 팩스 자료, 그리고 h군 경찰서 내부적으로 보관 하고 있던 비공개 문서등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바로 그 해, 목촌리에선 전쟁때 보다 더 많은 주민들이 죽어 나갔다. 전쟁때 빨갱이를 도왔거나 간첩 활동을 한 혐의가
있는 주민들이 대거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목촌리는 북측과 남측이 서로 밀고 밀리는 진퇴를 거듭하던 전쟁 기
간중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주둔하던 전쟁의 요충지 였다.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수시로 바꿨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체결되면서 그들의 위험스런 곡예는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그러자 정부는 사상범 색출 작전에 박차를 가했고 목촌리 주민중 사상범이라는 꼬리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구국 결사대는 그러한 사상범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전쟁중 인민군에 의해 공개 처형 되었던 국군과 경찰의 일부 과격한 유가족들로 구성된 민간 사조직이었다. 휴전은 되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은 셈이었다.
여전히 전국의 깊은 산골에는 공비들이 은신하고 있었고 주민중에도 상당수가 간첩활동 혐의가 짙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미처 정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군과 경찰의 부족한 인력들을 지원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은 사냥개와 죽창을앞세우고 직접 많은 사상범들과 공비를 색출하였고 때로는 현장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얼마나 합리적인 조사와 집행이 이루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결국 구국 결사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 해산되었고 한동안 각 지방관청에는 그들의 불법적 조사과정과 야만적 행위에 대한 고소와 탄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에선 그러한 고소, 탄원에 대해 단 한번도 실질적인 조사를 벌인 적이 없었다. 당시 목촌리는 구국 결사대에 의한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중 하나였다. 전쟁전 200여 가구에 달하던 목촌리의 주민수가 전쟁후 불과 20여 가구의 작은 산골 마을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구국 결사대 해산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인 1954년 3월 목촌리를 담당했던 h군 지부 구국 결사대 삼십여명이 갑자기 실종된 사건이었다.
4.. 죽음의 마을(2)
한꺼번에 사람 십여명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상한 사건. 당시 정부에서는 조사단을 구성하여 약 1년여에 걸쳐 그들의 실종에 대한 수사를 벌였지만 전혀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상의 자료에서 혜경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구국 결사대가 사상범과 공비를 색출할때 주로 사냥개와 죽창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사냥개와 죽창이라면 이번 목촌리 살인사건 피살자들의 사인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혜경은 어제 시경 자료실 선배가 보내준 팩스 자료들에서 더욱 결정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선배가 보내준 팩스 자료에는 지금까지 일어난 범죄들을 유형별로 분류한 방대한 자료중에서 이번 목촌리 살인사건처럼 짐승의 습격, 죽창에 의한 피살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사건들만 따로 분류한 것들이었다. 혜경의 예상대로 짐승의 습격, 죽창에 의한 피살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동일한 유형의 사건이 1955년 9월에도 일어났다. 놀랍게도 사건 발생 장소가 목촌리 흉가 부근이었으며 피살자 역시 이번 살인사건의 피살자와 같은 바로 b일보 신문 기자 2명 이었다.흉가와 신
문기자. 42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발생한 동일한 유형의 사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혜경은 다시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59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혜경은 적잖은 실망을 했다.
사건 발생 장소도 흉가가 아닌 서울의 평범한 주택가 였으며 피살자 역시 신문기자가 아니었다. 피살자는 모두 4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족이었다. 서울 한복판 주택가에서 짐승의 습격과 죽창을 이용한 살인에 의해 한 가족이 한꺼번에 살해되었다는 것이 그녀로선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믿기지 않는 사건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벌어졌다. 세번째 사건 1969년 6월, 사건 발생 장소 충남, 피살자 2명(가족). 1978년 1월, 서울, 피살자 1명, 직업 무, 1981년 11월, 서울, 피살자 3명(가족), 그리고 1997년 10월, 이번 목촌리 사건. 총 6건의 사건에 사망자 15명.
다시 커다란 벽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고 나타났다. 첫번째와 마지막 사건은 마치 동일인의 범행인 듯 모든 정황들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단지 두 사건 사이엔 42년이란 긴 세월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4건의 사건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건 발생 장소가 목촌리도 아닐뿐더러 그들의 직업이 신문기자도 아니었다. 다만 나머지 사건들의 공통점이라면 1건을 제외하곤 가족들이 한꺼번에 살해 당했다는 점이었다. 혜경이 밝혀낸 사실은 그것들이 전부였다.
아무리 자료들을 살펴보고 머리를 쥐어짜도 그녀는 더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갑자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듯 한 막막함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의외로 쉽게 풀어질 듯 하던 수수께끼가 완고한 벽에 부딪힌 것이다. 혜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차가운 새벽 공기가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그녀는 마당에 내려서서 최대한 숨을 깊이 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같은 동작을 그녀는 여러번 되풀이 했다. 그러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고 추위도 한결 견딜만 했다. 그녀는 복잡한 머릿속도 깨끗이 털어 버리려고 마당에 매달아 놓은 샌드백을 몇 번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머릿속은 조금도 맑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는 누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 부호들
이 신기루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 * *
해일을 비롯한 스텝들을 태운 9인승 봉고가 마침내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한국 기공 협회 회장 오윤창과 무속인 이정란은 승용차로 뒤따르고 있었다. 저녁 나절 부터 많은 비가 이 곳 강원도 지방에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촬영을 늦추자는 의견이 스텝들 사이에 있었지만 해일의 강력한 주장과 귀신을 만나려면 비가 오는 습기 찬 날이 오히려 제격이라는 무속인 이정란의 의견에 따라 촬영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일행들이 험한 비포장 길을 한시간 남짓 달려 목촌리 입구에 닿았을때는 이미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주위엔 어느새 ⅹ빛 어둠이 밀려 들었다. 중간에 큰 비를 만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일행들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장비를 챙겨들고 울창한 숲속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숲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어두웠다.
해일은 스텝들에게 김한수나 이창수의 죽음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자칫 괜한 혼란을 야기하거나 공연한 선입견으로 객관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해일 자신은 김한수나 이창수의 죽음에 대한 강한 의혹에 사
로잡혀 있었다. 해일이 하루라도 빨리 촬영을 강행하려 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언론뿐만 아니라 경찰까지도 그들의 죽음을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도심 한복판에서 짐승의 습격을 받았다는 점이나 그토록 처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목격자 한사람 없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해일은 그들의 죽음을 설명해 줄 실마리가 바로 흉가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해일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 끌었던 것은 흉가에 가지 말라던 김한수의 마지막 충고였다.
"김감독님! 오늘은 웬일로 그렇게 조용 하세요?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요?"
조연출 이영우의 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한창 너스레를 떨어가며 스텝들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을 김감독이 웬일인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하자 이영우는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김감독은 대답 대신 여전히 앞만 보고 묵묵히 걸을 따름이었다. 이창수의 죽음에 대해 알고난 후 그는 이번 촬영길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정말 귀신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근사한 총각 귀신 로....."
프리랜서 사진기사인 강은영이었다. 그녀는 일행의 맨 뒤에서 적외선 카메라맨 배영환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녀의 화사한 얼굴이나 밝고 세련된 옷차림은 다른 스텝들의 분위기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특히 그녀의 바로 곁에서 걷고 있는 배영환과는 마치 한 50년전과 50년후의 사람이 동시대에 나란히 걷고 있는 것처럼 우스꽝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배영환이 그녀를 돌아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강은영, 너 그러다 진짜 귀신 만나면 제일 먼저 도망가는거 아냐?"
배영환의말에 강은영이 눈을 흘겼다.
"걱정마세요, 저는 총각이라면 귀신이라도 환장하는 여자니까...."
"여자가 말투가 그게 뭐야? 정숙하지 못하게, 총각이라면 환장 하다니.... 쯧쯧.... 누가 데려갈지 걱정된다. 걱정 돼!"
"나참 기가 막혀! 절 누가 데려가든 배선배가 왜 걱정을 해요? 배선배보고 저 데려가 달란 소리 하지 않을테니 걱정말아요"
"걱정은 누가 한다고 그래? 그냥 한심해서 그래, 한심해서.... 도대체 요즘 여자들은 창피한걸 모른다니까!"
"배선배!"
강은영이 날카로운 소프라노 목소리로 소릴 질렀다.
"관두자, 관둬! 내가 참고 말지...."
최근 두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먼저 시비를 거는 쪽은 번번히 배영환이었다. 이후로도 내내 두사람은 말다툼을 벌였지만 두 사람 모두 따로 떨어져 걷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약 30여분 숲으로 들어가자 빗줄기는 눈에 뛸 만큼 굵어져 있었다. 울창한 숲도 빗줄기를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부랴 부랴 스텝들이 비닐을 꺼내 장비를 싸느라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비 때문에 날씨도 제법 쌀쌀해 졌고 질퍽거리는 산길은 처음부터 이번 촬영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 임을 예고하는 것만 같아해일의 마음은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스텝들이 흉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20분경 이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어서 주민들 인터뷰를 따려고 했지만 어찌된 셈인지 집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다. 마침내 테잎으로만 보던 흉가가 눈앞에 나타났을때 해일의 가슴은 까닭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4.. 죽음의 마을(3)
족히 백년은 더 되었을성 싶은 검게 불에 그을린 그 흉물스런 집을 아직까지 철거하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궁금할 만큼 집은 금방이라도 허물어 질 듯 위태하게 보였다. 집 뒤쪽으로 울창한 산이 바싹 붙어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들이 발디딜 톰
도 없이 자라 있었다. 다른 스텝들이 서둘러 마당으로 들어서서 짐을 풀고 촬영 준비에 분주 했지만 오직 김감독만은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 선뜻 내키질 않는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때면 자신은 항상 그 징후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5년전 촬영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며, 3년전 산악등반 촬영을 갔다가 조난 사고로 두명이 목숨을 잃은 일이며, 바로 작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까지 번번히 어떤 예감을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스텝들은 여느때와 다름없었다. 지금껏 수 많은 흉가를 가보았고 또한 그 곳에서 밤을 지새며 촬영을 했었기 때문에 이 곳이라고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진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무속 전문가인 오세창과 이정란은 집의 어떤 기운을 알아 보려는 듯 나름대로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해일은 그들에게도 일부러 테잎에 대한 것이나 이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또는 김한수나 이창수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귀뜸하지 않았다. 주위는 이미 칠흙같은 어둠으로 덮히기 시작했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해일은 집안을 구석 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 져 내릴 것 같은 집인데 용케 버티고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볼 때 보다 집안은 훨씬 넓었다. 방은 총 열 한개가 있었고 부엌과 그 옆으로 넓직한 광이 딸려 있었다. 각 방안에는 먼지와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맨 끝방 한쪽 구석엔 어떤 짐승이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듯 가운데가 움푹하게 패인 나뭇가지들이 수복하게 쌓여 있었다. 집안에서 해일이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부엌 옆에 딸려 있는 광이었다. 한쪽 문짝이 무너져 내려 비스듬하게 달린 그 곳은 바로 테잎 속에서 짐승의 귀가 시퍼런 광채를 내뿜고 있던 바로 그 곳이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 해일이 살짝 문을 밀치자 삐걱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무슨 냄새인지 모를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찔러 왔다. 해일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어디선가 싸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지나갔다.
렌턴의 불빛을 구석 구석에 비추며 안을 살폈다. 바닥엔 썩어버린 짚더미가 어지럽게 깔려 있었고 구석엔 주인을 잃은 농기구들이 붉게 녹이 슨 채로 아직도 아무렇게나 굴러 다녔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주위에 벽들이 온통 붉은 적토(赤土)로 발라져 있다는 것이었다. 렌턴 불빛에 비친 벽은 마치 피 빛으로 덮인 토굴 속이라도 들어와 있는 듯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김익재 촬영감독은 대청마루에서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곤혹스럽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보 박희철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것은 김감독이 그런 표정을 지을때 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님,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나 김감독은 대답 대신 먼저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리곤 엉뚱한 얘기로 입을 열었다.
"얌마, 너 나보고 맨날 신기(神技)가 좀 있다고 했지? 않 좋은 일만 귀신 같이 맞춘다고...."
"예, 그랬었죠"
"근데, 바로 그 신기가 별로 조짐이 않좋다. 웬지 마음이 안정이 안되고, 아까 이 집에 들어서는데 이상하게 가슴이철렁하고 내려 앉지 뭐냐. 난 말야 평소 내 목숨은 조상님들이 지켜준다고 믿는 사람인데 꼭 내 조상님들이 이 집안에서 빨리 나가라고 호통을 치시는 것 같더란 말이다"
"그.... 그럼, 어쩌죠? 감독님 그런 얘기할때 마다 제 가슴은 더 크게 철렁 한다니까요. 그때마다 아주 않 좋은 일이 생겼잖아요"
"젠장, 웬지 이번 촬영은 처음부터 내키지가 않더라구. 특히 그 창수놈 얘기 듣고부턴 더더욱....."
"네?"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촬영 왔으니까 딴 생각 말고 일이나 하자구"
강은영은 집안 구석 구석을 둘러보며 쉴새없이 카메라의셔터를 눌러댔고 그때마다 어둠속에서 눈이 부실만큼 밝은 불빛이 번쩍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배영환은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쭉 그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배영환의 온 신경은 오직 스틸 사진 기사 강은영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벌써 2년전의 일이었다. 어찌보면 자유분방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전형적인 현대여성의 조건을 두루 갖춘 강은영을 처음 본 순간 배영환은 밑도 끝도 없는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강은영에 비하면 여전히 19세말의 조선시대에나 맞을 법한 사고와 생활방식을 가진 사내였다. 강은영의 주변에는 언제나 젊고 활기 찬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고개를 한껏 제처가며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몸을 기대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했다. 배영환은 그런 그녀가 웬지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에게 특별히 밉게 보일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자연 그녀 앞에서 배영환의 심사는 뒤틀릴 수 밖에 없었고 둘은 만나기만 하면 툭닥거렸다. 배영환은 처음 그녀에 대한 자신의 이유없는 미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바로 흔히 남들이 말하는 사랑이 라는 치명적인 질병임을 알아차리고 그는 몹시 당황했고 극구 자신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을만큼 그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투덜거리기만 할 순 없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여동안 미움이라고 여겨왔던 자신의 감정을 한순간에 사랑이라 그녀에게 드러내기에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말과 행동은 번번히 마음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삐져나왔다. 어둠속에서 한참을 셔터를 눌러대던 강은영이 손을 멈추고 돌아섰다.
"배선배, 언제까지 제 뒤만 쫓아 다닐 거예요? 저한테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님,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그녀의 갑작스런 공격에 배영환은 마치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듯 당황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또다시 후회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착각하지마, 내가 뭐 널 좋아하기라도 해서 따라다니는줄 알아? 아까 정pd가 나한테 붙어 다니라고 그러더라. 집도 으시시한데 괜히 헛것보고 기절이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깐!"
"이봐요, 배선배, 제가보기엔 선배가 더 으시시 하네요. 거, 얼굴 밑에 렌턴 좀 치우고 얘기할 수 없어요? 안 그래도 기분이 별론데 거기 그렇게 귀신 같은 얼굴로 따라 다니니까 더 신경이 쓰이잖아요"
강은영이 핀잔주듯 한마디 쏘아 붙이고 다음 방으로 건너가자 배영환은 맥이 빠지는듯 렌턴을 한대 후려치곤 중얼거렸다.
"젠장, 별게 다 훼방을 놓는다니깐!"
4.. 죽음의 마을(4)
해일이 광에서 나와 대청마루까지 뛰어가는 사이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의 시퍼런 섬광과 함께 엄청난 천둥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산중에서 듣는 천둥소리는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사람의 가슴을 절로 서늘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청마루까지 뛰어가는 단 몇 초간 해일의 온몸은 순식간에 흠뻑 젖어 버렸다. 대청마루엔 김감독과 박희철이 렌턴 불빛에 의지해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김감독님, 카메라를 이쪽 광에다 셋팅해 주셔야 겠는데요?"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요. 그건 그렇고 광에는 뭐 이상한거 없어요?"
"예, 지금봐선 별로 특별한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동안 해 왔던대로 전체적인 스케치부터 해주세요. 그리고 포인트를 잡아서 집중적으로 좀 잡아 주시고.... 근데 다른 스텝들은 다들 어디 갔죠?"
그때 어둠속에서 스크립터 김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pd님, 이리 좀 와 보세요"
김혜진은 이영우, 그리고 기공 전문가 오세창, 무속인 이정란과 함께 왼편 끝방에 있었다. 오세창은 손에 나침반 같은 쇠붙이를 들고 집 주변의 수맥(水脈)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침이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곳은 집이 들어설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집은 호수에 떠 있는 것과 마찬가지 형상을 하고 있어요"
"호수에 집이 떠 있다구요?"
"네, 대부분의 흉가나 터가 좋지 않은 집을 가 보면 흔히 물이 흐르는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수맥이 인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사람이 기(氣)를 제대로 펴고 살기가 힘들죠. 그래서 병에도 걸리고 마음이 심약해져 헛것을 보기도 하는데 이곳은 물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 넓이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이 이 집터 아래에 가득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집이라면 아마 그동안 액운이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엔 이정란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긴장되고 상기되어 있었다.
"저기를 좀 보세요"
그녀는 렌턴으로 방문 위쪽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거기엔 대나무 가지가 기묘한 모양으로 꽂혀 있었다.
"대나무 아닙니까?"
"그래요, 대나무죠. 저건 귀신을 쫓을때 주로 사용하던 비법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 집안 전체가 온통 귀신을 쫓기 위한 비방들로 가득합니다. 대청마루 쪽에 다듬이 돌을 엎어 놓은 것 하며, 광에 적토로 벽을 발라 놓은 것, 그리고 이리 나와 보세요"
그녀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해일을 방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녀는 렌턴을 빗줄기가 내리치는 마당에 비추었다.
"저기 마당에 흥건한 물들이 보이죠? 모두 붉은색이예요"
"그럼, 마당의 흙들도 광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적토란 말입니까?"
"그래요, 마당의 흙도 광과 마찬가지로 온통 적토로 되어 있어요. 예전부터 귀신을 쫓기 위한 대표적인 비방이 대문에 피를 칠하거나 아니면 저렇게 적토를 발라 놓는 것인데 이 집은 온통 적토로 가득 차 있어요. 그리고 이 집이 온통 검게 그을린 것도 제가 보기엔 단순한 화재때문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계속되는 이정란의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이 집안엔 온통 악한 기운이 가득해요. 집안 전체가 악귀들로 둘러 쌓인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험한 곳을 많이 다녔지만 이번처럼 기운이 강한 곳은 처음이예요. 이따 자정이 지나면 제가 이 집안에 있는 귀신들을 한번 불러내 보도록 하죠. 도대체 이 집안에 가득한 귀신들이 어떤 원귀들인지"
이정란은 그 어느 때보다 힘주어 말했고 해일은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흉가에 가지 말라던 김한수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때 어둠속에서 또 하나의 렌턴 불빛이 더듬거리며 일행들을 향해 다가왔다. 배영환과 강은영이었다. 배영환이 말했다.
"이거 도대체 전기가 없으니까 여간 불편한게 아닌데요? 정pd님 카메라를 어디에 셋팅하죠?"
"적외선 카메라는 저기 마당쪽에 좀 셋팅해 주세요?"
그러자 배영환이 무슨 소리냐는듯 마당쪽으로 렌턴을 비추었다.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마당에는 아무리 살펴도 카메라와 몸을 숨길만한 엄페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기.... 저 마당에 카메라를 셋팅하란 말씀이세요?"
"좀 무리긴 하겠지만 그렇게 좀 해주세요. 마당쪽에서 이 집안 전경과 내부를 잡아 주셔야 합니다"
"우와 난 죽었네. 저런 빗속에선 우의를 입어도 아무 소용 없는데...."
배영환은 울상을 지으며 렌턴으로 연신 마당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그런데 렌턴을 비추던 배영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저.... 저게 뭐죠?"
모두의 시선이 배영환이 가리키는 마당으로 쏠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내리쏟는 빗줄기 속에서 분명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모두가 긴장한채 그 곳을 주시했다. 어둠속인데다 비까지 퍼부어서 렌턴 불빛만으로는 언뜻 무엇인지 쉽게 분간하기 어려웠다. 잠시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영우가 먼저 소리 쳤다.
"사..... 사람 아니예요?"
"뭐, 사람?"
이영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그만 우산으로 가까스로 비를 피하며 마당으로 들어서는 이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모두 세명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마당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이쪽을 노려보며 유령처럼 꼼짝않고 서 있었다.
"저 사람들 뭐하는거야? 우리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본데?"
이영우의 말에 이정란이 덧붙였다.
"우리한테 별로 좋은 얘길하러 온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자 배영환이 소리쳤다.
"거기 누구요? 무슨 일이요?"
그러나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예상대로 다가온 그들은 모두 나이가 예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들이었고 하나같이 얼굴에 핏기라곤 없어 보이는 창백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불빛에 드러난 그들의 얼굴엔 이유를 짐작키 어려운 적개심까지 드러나 있었다. 노인들은 대청마루 바로 밑에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스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을때 노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얘기였다.
"당장 여기서들 나가!"
스텝들이 모두 노인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질 못해 어리둥절 하는 사이 노인의 두번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두번째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크고 분명했다.
"여기서들 당장 나가라니까!"
4.. 죽음의 마을(5)
구반장은 혜경에게 호되게 당한 그날 이후 혜경이 하는 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법도 없었다. 구반장의 그런 태도가 혜경에게 다소 부담이 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 해결이 되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한 두사람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사이에서 오히려 가장 불편한 사람은 바로 박호철 순경이었다.
하루종일 두사람의 눈치만 살피던 그가 크게 기지개를 키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만 퇴근들 않하세요?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러나 두사람중 누구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사람이 없자 그는 머쓱하게 창문을 내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징그럽게 오는구만. 비가 이런 식으로 몇 일만 더 내리면 우리 군은 아주 물바다가 되겠는데요? 아참, 그나저나 오늘 서울에서 방송국 다큐맨터리 제작팀이 목촌리 332번지에서 무슨 촬영을 한다고 하던데 비가 이렇게 와서 제대로 촬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자 그의 말에 혜경과 구반장 두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구반장이었다.
"이봐, 박순경, 방금 뭐라고 했어?"
뜻하지 않은 구반장의 반문에 박호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 슨 소리요?"
"방금 무슨 다큐맨터리팀이 어쩌고 그랬잖아!"
"아...예, 그 얘기요? 아까 낮에 행정과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서울에서 온 방송국 사람들이 오늘밤 이번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332번지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허가를 내달라고 해서 내 주었다고. 뭐라더라? 그 곳에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힌데나? 하여간 방송 만드는 놈들......"
그러나 박호철의 얘기는 더이상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구반장이 갑자기 책상을 내리치며 소릴 질렀기 때문이다.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박호철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구반장이 다시 소리쳤다.
"이런 미친놈들,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모두 몇 명이래?"
"그.... 그건 잘....."
박호철의 말에 구반장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돌연한 구반장의 행동에 어리둥절 하기로 치자면 박호철보단 혜경쪽이 더 했다. 다큐맨터리 팀이 332번지에서 촬영을 한다는 박호철의 얘기를 듣고 놀란 것은 오히려 혜경이었다. 아직 사건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곳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모두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만 해도 이번 살인사건 취재를 했던 기자와 카메라맨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시경으로부터 전해 들은 그녀였다. 그런데 구반장이 저렇게 펄쩍 뛰는 것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332번지 일이라면 무조건 빠지려고만 하던 구반장이 아니던가. 그녀는 구반장의 진의를 파악하려는듯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이 곳 h군에 배치를 받은 이후 처음 보는 구반장의 모습이기도 했다. 갑자기 구반장이 소리쳤다.
"지금 출동할 수 있는 인원이 우리 셋 뿐인가?"
박호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는 다시 실내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시종 손을 마주 비벼대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질 못하던 구반장이 마침내 어떤 결심이 선 듯 박호철과 혜경을 보곤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혜경은 지금 그의 표정이 몹시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 다 당장 나하고 같이 목촌리로 출동할 준비해. 그리고 무기고에서 m16 소총, 권총, 실탄.... 또 뭐가 있지? 하옇튼 있는대로 모두 챙겨, 어서!"
구반장의 말에 혜경과 박호철 두사람은 동시에 놀라서 입을 벌였다.
"네? 반장님 방금...."
"내말 안들려? 어서 서두르란 말야, 시간이 없어! 어서!"
갑자기 목촌리로 출동하자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데 무기까지 챙기라니. 혜경은 구반장이 지금 어떻게 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구반장의 표정은 긴지하고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구반장의 지시대로 세사람이 무기를 챙겨 목촌리로 출발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세사람 모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고 구반장은 m16 소총까지 곧추세워 들고 있었다. 박호철은 운전하는데 여간 애를 먹는 눈치가 아니었다. 칠흙같은 어둠에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때문에 승용차의 시야는 불과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윈도 부러쉬를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빗물을 감당하진 못했다. 차안에서 구반장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은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호철이 운전을 하며 연신 룸미러로 구반장의 안색을 살피곤 혜경과 눈이 마추졌지만 영문을 모르긴 두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혜경이었다.
"저기, 반장님! 저희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나 알고 가야죠. 이렇게 무작정 갈 순 없잖아요"
그러나 구반장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아무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한 혜경이 다시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구반장이 눈을 떴다.
"윤형사, 332번지 흉가에 대한 수사는 잘 진행되나?"
"네?"
"수사에 진전이 있냐고...."
"뭐, 아직은..... 하지만 몇가지 사실들을 알아내긴 했어요. 그 흉가를 중심으로 한 목촌리 마을의 내력에 대한 것들인데....."
"그럼, 이번 같은 살인사건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알아냈겠구만!"
"그럼, 반장님도 알고 계셨어요?"
"윤형사는 귀신의 존재를 믿어?"
"귀.... 귀신요?"
"그래, 귀신!"
"그.... 글쎄요"
"우린 지금 귀신과 싸우러 가는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혜경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구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틀림없는 구반장이었지만 그의 눈은 평소 그의 눈빛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광기와 형언키 어려운 공포, 그리고 그 너머로 얼핏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 그런 것들이 그의 눈엔 진하게 베어 있었다. 혜경은 지금 구반장의 눈빛과 비슷한 눈빛을 어디선가 보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건 바로 목촌리 주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던 눈빛이었다.
5. 공포의 밤(1)
노인들은 모두가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계속해서 촬영팀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영우가 계속해서 노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별로 성과는 없어 보였다.
"몇 번을 말씀 드려야 아시겠어요? 저희는 분명히 군에서 촬영 허가를 정식으로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공연히 시간 낭비 마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들 가세요"
그러나 노인들은 물러서긴 커녕 더욱 무서운 눈으로 스텝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들이 오늘밤 이곳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모두..... 모두가 죽을게야. 어서 그 집에서 나오라니깐!"
"무서운 일이 벌어질거야, 당신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
한 노인은 눈 앞에 정말 그가 말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다 못해 해일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들이 뭔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던 비가 쏟아지는데 그렇게 밖에들 계시지 마시고 이리로 올라 오셔서 저희하고 차근 차근 얘기를 좀 하시죠"
"우린 안 올라가, 아니, 못 올라가! 그 끔찍한 집으로는 절대 못 올라가"
"좋습니다. 그럼 제가 내려가죠"
해일이 대청마루 아래 노인들 앞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 서서 보니 과연 노인들의 얼굴엔 그들의 말처럼 두려움이 가득 했다. 스텝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지만 정작 겁에 질려 있는 것은 그들이었다.
"저는 정해일이라고 합니다. 촬영팀의 책임자죠. 노인장들이 두려워 하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희도 영문을 알아야 철수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닙니까?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해일이 구체적으로 묻고 나서자 노인들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나타났다. 그들은 두려운 눈길로 해일을 바라보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해일은 그들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풀 수 있으리란 기대로 더욱 다가서며 다그쳤다.
"이곳에서 얼마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죠? 그리고 그 해괴한 살인사건이 바로 이 집과 관련이 있는거죠? 그렇죠? 제발 말씀해 주세요. 제 친구도 이 집을 취재 왔다가 여기서 죽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러자 노인들이 더욱 뒤로 물러서며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장 그 곳에서 나오라니까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좋아, 정 너희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별 수 없지. 우린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어. 그러니 너희들이 무슨 일을 당하든 우린 모르는 일이야"
말을 마친 노인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스텝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를 보는듯한 눈빛이어서 스텝들은 하나같이 섬쓺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노인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마당을 빠져 나갔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었다. 스텝들 모두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영우가 노인들이 사라진 고개쪽을 보면서 말했다.
"기분 나쁜 노인들일세? 왜 우리보고 자꾸 이 집에서 나오라고 했을까요? 뭔가 사연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엔 강은영이 나섰다.
"참, 근데 정pd님 아까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단 얘기는 뭐예요? 그리고 뭐 친구 어쩌고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처음 듣는 얘긴데,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어요?"
스텝들의 눈길이 일제히 해일에게 집중되었다. 고개를 숙인채 잠시 망설이던 해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들은 대로입니다. 얼마 전 바로 이 흉가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신문에서 보았을 겁니다.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세명의 신문기자와 사진기자가 짐승에 뜯기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며 한창 메스컴에서 떠들었던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해일의 말에 스텝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강은영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 다 가까스로 참았다.
"저.... 정말 이곳에서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 났다는 거예요?"
"아니, 그럼 출발하기 전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친구 얘긴 또 뭐죠?"
"아직 경찰에서 공식발표는 하지 않고 있지만 저희 방송국 보도국에 김한수 기자라고 있습니다. 그는 제 친한 친구입니다. 그 역시 이곳에 취재를 왔다가 똑같이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감독님의 후배로 김기자와 함께 이곳에 취재왔던 이창수라는 카메라맨 역시 그와 함께 살해 되었고...."
스텝들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미안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하지만 행여라도 괜한 선입견들을 가질까봐 말을 하지 않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곳에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단순히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바로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해일은 이럴줄 알았으면 출발전 미리 얘기할걸 잘못 했다는 후회가 되었다.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의외로 김감독이었다.
"다들 새삼스럽게 왜들 그래? 지금 귀신이 무서워서 떨고 있는거야? 모두가 여기까지 귀신 찾으러 온 사람들 아니었어? 사실 나는 정pd한테 출발전 모든 얘기들을 들었다구. 그리고 그땐 별 얘기 아니었어. 괜히 여기와서 이상한 노인들 나타나 한번 휘젖고 나니까 엉뚱한 생각들을 하는거지. 어느 흉가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사람 한명쯤 없는 곳 봤어? 그리고 사람 한두명 안 죽은 흉가봤어?"
김감독의 말이 끝나자 배영환이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김감독님 말이 맞아요, 괜히 쓸데없는 공상들 하지 말고 어서 일이나 합시다. 자, 다들 일어나요"
"그래요, 일합시다. 그나저나 저 비나 좀 그쳤으면 좋겠구만"
스텝들은 다시 주섬 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김감독과 박희철은 광으로, 배영환은 비닐에 적외선 카메라를 단단히 싼 다음 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강은영은 김혜진과 함께 각 방을 돌아 다니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리고 해일은 이정우와 함께 전체를 돌아 다니며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정각 자정이 되면 광에서 무녀 이정란이 귀신을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자정까진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 * *
"반장님, 길이 완전히 엉망이예요. 온통 진흙탕이라구요"
앞장 서서 걷고 있던 박호철이 소리쳤다. 빗소리가 워낙 커서 바로 앞에서 외치는 그의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박호철의 말대로 험한 산길인데다 온통 진흙탕이라 한 걸음 떼어 놓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박호철의 뒤에 구반장이 있었고 그 뒤를 혜경이 따르고 있었다. 혜경의 손에 들린 렌턴 불빛이 비틀거리는 그녀의 움직임만큼이나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박순경, 그 쪽 말고 아랫쪽으로 돌아가! 낙엽들이 쌓인 쪽이 훨씬 걷기가 나을거야"
구반장이 목청껏 소리쳤다. 하지만 낙엽이 있는 아래쪽도 걷기가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세사람은 번번히 아래쪽으로 미끄러지곤 했던 것이다. 결사적으로 산길을 오르는 구반장의 뒷모습을 보며 혜경은 많은 혼란을 느꼈다. 구반장이 이번 사건에 대해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반장은 왜 자신이 흉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그토록 싫어 했을까? 구반장의 얼굴에 나타났던 그 공포와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엉뚱하게도 무기를 휴대하라는 이유는?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혜경의 가슴을 두들겨 댔다. 혜경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구반장을 향해 소리쳤다.
"반장님, 말씀해 주세요. 흉가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거죠? 반장님은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시죠?"
"..............."
"말씀해 주세요"
"목촌리 사건을 취재하던 신문기자나 취재기자들이 모조리 죽어 나간걸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어요"
"그들이 왜 죽었는지 알아? 목촌리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길 싫어해. 세상이 목촌리에 대해 알려고 하는 걸 아주 싫어 한다구! 그래서 그들이 죽은 거야. 목촌리를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 자들은 모두 죽게 되어 있어!"
"그게 무슨 말이세요?"
"목촌리에는 살아있는 유령들이 있어"
"유령이라니요? 전 도대체....."
"그래, 그들은 아주 끔찍한 것 들이야. 그들은 목촌리 사람들 모두가 죽기를원하는 거야. 그것도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오랜 세월 고통 받다 죽기를 원하는 거지"
구반장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목촌리 주민들은 그들의 존재와 자신들의 삶을 운명으로 체념하고 있어. 아무도 거기에 대해 새삼스레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지. 보통 사람들이 그저 운명처럼 기다리는 죽음을 그들도 기다리는거야. 다만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지"
"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달라졌다지만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지. 목촌리가 바로 그래.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은 목촌리에 존재해 왔어. 그들은 목촌리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과 목촌리 주민들 모두를 죽이는거야. 나 또한 머지않아 그들이 데리러 올거야. 나도 목촌리 출신이거든!"
"반장님이 목촌리 출신이라구요?"
"목촌리 사람들의 운명은 둘중 하나야! 어느날밤 예고없이 찾아온 그들에 의해 죽음을 맞던지, 정신병자가 되어 모든걸 잊어버리던지......"
"도대체 그들이 누구예요? 왜 막지 않는거죠?"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그들은 목촌리 사람들의 삶속에서만 존재하거든. 아마 내 모든 얘길 들으면 윤형사 역시 날 정신병자 취급을 하겠지만 오늘밤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모든걸 얘기해 주지. 그땐 윤형사도 이미 목촌리 주민과 한배를 타고 있을테니까. 지금 몇시야?"
"이제 막 자정을 넘어섰는데요?"
"젠장! 벌써 거나하게 잔치가 벌어졌겠구만!"
5. 공포의 밤(2)
이정란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김감독은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고 나머지 스텝들은 휴대용 램프 하나를 가운데 밝혀두고 이정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정을 넘자 곧바로 그녀는 집안에 있는 귀신을 불러서 이 집안의 내력을 알아 보겠다고 했다. 다른 스텝들에 비해 유독 스크립터 김혜진만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사한지 얼마 안된 신입사원이었다. 한 두어번 촬영을 따라 다녔다지만 이런 촬영이 그녀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정란이 신이 내리면 저절로 움직일 것이라며 자신의 앞에 꽂아둔 신대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정란은 계속해서 귀신을 불러 들이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었고 그녀의 이마엔 땀이 번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정란의 중얼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긴 불가능했다. 그것은 주절거림 같기도 했고 신음 소리같기도 했다. 해일은 두려움과 기대가 반쯤 섞인 심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이정란의 소리가 갑자기 더욱 커지며 땅 바닥에 꽂아둔 신대의 방울이 딸랑하는 소리를 낸것은. 그것을 지켜본 모든 스텝들이 숨을 멈추었다. 김혜진이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어.... 어떻게! 정말 움직였어요"
이정우가 김혜진을 향해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조용히 해!"
신대에 매달린 방울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신대는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요동을 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신대의 흔들림 만큼이나 이정란의 몸이 더욱 무섭게 떨리고 시작했고 그녀의 중얼거림 또한 더욱 커졌다. 전 스텝들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할 때였다. 김감독이 흥분된 목소리로 해일을 불렀다.
"저.... 정pd!"
그는 창백한 얼굴로 카메라의 화인더를 가리켰다. 해일이 카메라의 화인더를 보았을때 그 안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육안으론 전혀 보이지 않던 이상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며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한 것이다. 시퍼런 연기같기도 한 그것은 이정란의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정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자 몇 초 후 이정란의 신음 소리가 급격하게 불규칙해지더니 마침내 울먹임으로 변해 버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엔 확연히 드러날 정도의극심한 공포심이 드러났고 고통스런 울먹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해일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즈음 그녀를 주의깊게 관찰하던 오세창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게 아니예요"
스텝들이 모두 오세창을 바라보았다.
"뭐....뭔가 잘못 됐어요, 중지 시키고 이선생을 깨워야 해요, 어서!"
갑작스런 그의 말에 스텝들이 술렁거렸다.
"내 말 안들려요? 그녀를 깨워야 한다구요!"
비로소 해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물 갖고 와요, 물!"
비로소 다른 스텝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물을 찾아 허둥대고 해일과 오세창은 달겨들어 이정란을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이선생, 정신 차려요!"
스텝들이 떠온 물을 이정란에게 끼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릴 뿐이었다. 다시 누군가가 소리쳤다.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저러다 사람 잡겠어요!"
"광에서 끌어내요, 밖으로 끌어내라구!"
모든 스텝들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허둥거렸다. 두서없는 외침소리가 난무했다. 그러나 이정란을 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해일을 비롯한 이정우, 오세창, 박희철등 네명의 장정들이 달겨들었지만 그녀의 몸은 땅에 박힌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동자가 하얀 흰자위를 드러내고 입에서 거품을 풀기 시작했다. 김혜란이 울음을 터뜨렸다.
"꼼짝도 안해요, 밖으로 끌어낼 수가 없다구!"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무슨 일이야!"
"방법을 찾아야지, 방법을!"
여기 저기서 흥분한 외침 소리들이 튀어 나왔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정란의 신음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정란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강한 힘에 의해 한꺼번에 그녀의 몸에서 밀려났다. 그녀는 더욱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댔다. 모든 스텝들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정란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비좁은 광 안에는 숨 막히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찼다. 모두들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때였다.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왼쪽팔이 무엇인가에 물러 뜯기듯 제멋대로 요동을 치더니 그녀의 흰색 한복이 붉게 물들며 뜨거운 핏줄기가 솟구친 것은.
"으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 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정란의 몸은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물어 뜯기고 있는 듯 했으며 그녀의 고통스런 비명소리는 더이상 들을 수 없을만큼 처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광안은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그들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광을 뛰쳐 나간 사람은 김혜진이었다. 그녀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마냥 비명을 지르며 광을 뛰쳐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또 누군가가 뛰쳐 나가고, 또 나가고..... 해일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공포로 이정란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해일의 머릿속에 악마의 포식이란 어느 책 제목이 떠올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의 귓전으로 죽은 김한수의 절규가 들려왔다.
'흉가에 가지마! 놈들은 끔찍한 괴물들이야, 무서워, 해일아! 무서워!'
해일이 검붉은 피를 온몸에 흠뻑 뒤집어 쓴 채 마지막으로 광속에 뛰쳐 나왔을때는 그 역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먼저 나온 스텝들이 마당에서 김혜진과 강은영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강은영은 배영환에게 안긴 채 부들 부들떨고 있었고 김혜진은 비가 쏟아지는 마당 한가운데서 계속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정우가 그녀의 따귀를 때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정신 차리란 말야! 제발 조용히 좀 해!"
모두들 마당 한가운데 얼이 빠진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온 몸을 두들기는 굵은 빗방울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어서 이 끔찍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 뿐이었다. 해일은 사람의 뇌가 갑자기 그 움직임을 멈춘다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머리속은 텅 비어 버렸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칠흙같은 어둠뿐이었다. 배영환이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듯 발작적으로 일어서며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겁니까? 어서 이 곳을 벗어나지 않고, 난 무서워요. 단 1초도 이 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구요!"
배영환의 말에 강은영이 정신없이 악을 써 댔다.
"어서 이 곳을 빠져 나가자구요! 난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어서요!"
다들 공포에 질린 얼굴로 광 쪽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광에선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아직도 휴대용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평화롭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해일이 낮게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그의 한마디에 모두의 숨이 멎었다.
"저 소리..... 저 소리 들려요?"
모두의 눈길이 광쪽으로 쏠렸다.
5. 공포의 밤(3)
분명 그 소리는 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빗소리에 묻혀 전해오는 그 소리는 응얼거림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강은영이 쥐어짜는 음성으로 울먹였다.
"제발! 난 더이상 못 참겠어요. 어서 여기서 나가요, 어서!"
"뭔가 있나봐요! 뭔가 있다구요!"
흥분과 두려움이 섞인 외침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그때 해일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며 다가오는 어떤 것을 보았다. 안개였다. 다시 불꽃처럼 김한수의 외침이 뇌리를 스쳤다.
'으으으..... 놈들이 왔어, 안개가 보이면 놈들이 온거야. 제기랄! 도망 갈수 없어! 살려줘!'
온몸에 피가 곤두서는 섬뜩함. 해일은 더듬거리듯 간신히 소리쳤다.
"다.... 다들 어서 이곳에서 나가야 해요. 이곳을 나가야 한다구, 어서!"
비가 쏟아지는 진흙탕 속에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을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흙탕속에 미끄러지고 엎어지면서 그들은 한꺼번에 달리기 시작했다. 해일이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김혜진이 움직이지 못하고 비가 쏟아지는 마당 한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아보니 나머지 일행들은 벌써 고개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김혜진, 뭐하는 거야, 어서와!"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사람마냥 멍하니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그녀를 둘러싸는 안개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해일은 그녀를 향해 오던 길을 달려갔다. 해일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듯 잡고 일으켰을때 그녀는 거의 눈에 촛점을 잃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정신차려! 여기 있으면 안돼! 도망가야 한다구!"
해일이 그녀를 잡고 흔들며 악을 썼지만 그녀의 눈에는 더이상 해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침내 해일이 그녀를 진흙탕에서 질질끌다시피 하며 달아나기 시작할 때 광쪽에서 더욱 분명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본능적으로 광쪽을 돌아 보았을때 그는 광의 흐린 불빛을 등지고 이쪽을 노려보며 서 있는 십여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 손에 긴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있었으며 그들의 뒤쪽에선 막 푸른 광채가 도는 눈빛들이 어슬렁거리며 기어나오고 있었다. 해일은 그것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리, 두마리, 세마리.... 그것들은 계속해서 기어 나왔다. 그리곤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해일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그녀를 잡아 끌며 악을 썼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정신차려!"
그러나 혜진의 의식은 이미 완전한 두려움에 휩싸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못했다. 짐승들은 순식간에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 왔으며 해일은 더이상 그녀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터질 것 같은 공포와 좌절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짐승들은 바로 10여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두사람을 덮칠듯 으르렁거리며 천천히 한발자욱씩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진흙탕에 쓰러진 김혜진을 내려보았다. 가엾게도 그녀의 촛점없는눈동자가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치며 목이 메어왔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남겨둔채 그는 진흙탕을 미친듯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굵은 빗방울이 아프도록 부딪혀 왔다. 등뒤에서 짐승들의 포효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 보았다.
짐승들이 혜진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아까 보았던 일단의 무리들이 혜진을 향해 손에 든 막대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해일은 감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채 그들을 지켜 보았다. 해일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해일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일제히 막대를 치켜들었다. 그리곤 해일이 미쳐 소리를 칠 틈도 없이 막대를 가차없이 혜진을 향해 내리 꽂았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해일은 온몸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사내는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막대를 내리 꽂았고 이윽고 그들이 뒤로 물러서며 낯선 소리를 냈다.
"쉬익! 쉭! 쉭!"
마치 쇳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숨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짐승들이 그녀를 향해 달겨들었다. 뒤로 물러 선 그들은 똑바로 해일을 노려보았다. 해일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해일은 비틀거리며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것 처럼 요동을 치고 있었다.
6. 살아있는 유령(1)
맨 앞에 걸어가던 박호철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무슨 일이야?"
구반장이 소리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구반장 역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이제 5분만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텐데.
"왜 안 가세요?"
혜경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섰을때 구반장이 초조하게 내뱉았다.
"젠장, 물이 너무 불었어!"
혜경이 그들의 아래쪽으로 렌턴을 비추었다. 그 곳엔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다리위로 거센 물살이 범람하고 있었다. 다리는 아직까지 형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를 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 올때마다 그 다리가 상당히 위험스럽다고 느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멀리 어렴풋이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반장님, 돌아갈 길은 없나요?"
"없어, 이 길 뿐이야!"
검은 물살 아래로 다리의 윤곽은 보였지만 누군가 그 위에 한 사람만 올라섰다간 금방이라도 거센 물살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처럼 다리의 지탱력은 불안해 보였다. 빗방울은 조금도 기세를 누추지 않고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이대로 기다리다간 그나마 다리의 형체마저 없어져 버릴 것이었다. 구반장은 진흙탕 위에 아예 주저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박호철과 혜경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다리를 쳐다 보았다. 구반장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다리 건너편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다. 구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절박하게 소리쳤다.
"다리를 건너야 겠어, 내가 먼저 건널테니 무사히 건너면 뒤따라 와!"
"반장님, 너무 위험해요!"
"방법이 없어, 아무리 내가 비겁한 놈이라도 그 많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놈들에게 당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어!"
구반장이 성큼성큼 다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혜경이 알고 있던 구반장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반장이 한발을 다리위로 내밀었다. 강한 물살이 그의 발목을 휘감아 왔다.
"반장님, 제발 조심하세요"
혜경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반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반장에 대한 자신의 오해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앞으로 그녀는 구반장을 무조건 믿고 따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구반장이 다리를 무사히 건넌 다음의 일이었다. 구반장이 두 다리를 동시에 다리에 올려 놓았다.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하던 구반장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조심 조심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다리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 대한 강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 물살이 그의 발목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그의 발목 아래에 버티고 잇는 다리가 어느 정도의 버팀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혜경과 박호철이 조바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구반장이 무사히 다리를 건너갔다. 미쳐 마음을 놓기도 전에 다음은 박호철의 차례였다. 구반장이 건너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균형을 잃지 말고 가능한 바닥에서 발을 높이 들지 말고 끌면서 건너와, 발을 들면 안돼!"
박호철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다리위로 올라섰다. 그 역시 반장의 지시대로 조심스럽게 다리를 무사히 건넜다. 혜경은 다리가 생각보단 튼튼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혜경은 주저없이 다리위에 올라섰다. 바라보던 것보다 물살의 저항은 훨씬 강했다. 그녀는 반장의 말대로 다리를 끌면서 천천히 다리를 건너갔다. 그런데 그녀가 다리를 거의 건넜을때였다. 그녀가 밟고 있는 다리가 휘청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사이 다리가 한순간에 허물어 졌다.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6. 살아있는 유령(2)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녀는 검은 물살 속으로 휩쓸렸다. 눈앞에 구반장과 박호철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손을 뻗치기엔 먼 거리였다.
"윤형사!"
구반장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지만 빗소리와 그녀를 덮치는 검은 물살 때문에 그녀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떠내려 간다는 생각과 끊임없이 입안으로 몰려드는 검은 물이 그녀의 의식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헤엄을 쳐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강한 물살은 몸의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차츰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이 흐려지면서 그녀는 죽음이란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이 현실의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아래로 떠내려가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끌어올려, 어서!"
구반장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최대한 의식을 가다듬어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론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손으로 자신을 붙잡은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구반장의 힘겨운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 밖에선 박호철이 몸이 반쯤 물에 잠긴채 그녀를 끌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간의 사력을 다한 사투끝에 혜경이 가까스로 끌어올려지고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물에서 기어 나왔다. 구반장은 나오자마자 혜경의 옆에 나란히 쓰러지듯 드러누워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혜경은 기침을 심하게 했다. 계속해서 구역질이 나와서 그녀는 속이 몹시 쓰라렸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박호철의 걱정스런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옆을 돌아 보았다. 그녀보다 더 지친 모습의 구반장이 꼼짝도 하지 않고 곁에 누워 있었다. 그는 혜경이 정신을 차린 한참 후에도 그대로 그렇게 누워 있었다.
* * *
해일이 쓰러질듯 고개를 넘었을때 그 아래에는 나머지 스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넘어선 후에야 해일과 혜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해일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해일을 부축한 사람은 이정우였다. 그는 두려운 눈길로 물었다.
"혜.....진이는요?"
해일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정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설마?"
해일이 곤혹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김혜진은 이정우와 가장 가까웠다. 이정우는 마치 김혜진을 돌보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듯 괴로워했다. 김감독이 끼어 들었다. 그는 비교적 안정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그것들이 다 무엇 이었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것들은..... 광에서 나왔어요"
"광에서요?"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광에서 퍼런 광채를 번득이며 기어 나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처음 보는 짐승들이었어요. 늑대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들 속에 누군가가 있었어요"
"누.... 누군가라니?"
"틀림없이 사람이었어요. 놈들은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 놈들이..... 그것으로..... 혜진이를 향해 내리 쳤어요. 몇번 더.... 참혹하게 내리치곤..... 짐승들이......"
어느 누구도 더이상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그들의 얼굴엔 더욱 분명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들의 모습에서 해일은 이번 일이 바로 자신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생각때문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한편으론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짐승들과 낯 모르는 살인마가 잠시후면 자신이 넘어온 바로 그 고개에 얼굴을 내밀 것이다.
"다들 마음을 단단히 먹읍시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진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어서 이 곳을 벗어나야 해요, 마을로 가서 도움을 청합시다. 그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을 겁니다. 어서 서둘러요!"
스텝들은 다시 앞쪽에 보이는 불빛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해일은 맨 뒤에 쳐져 계속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 끔찍한 짐승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등줄기를 꿰뚫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렌턴 하나도 들고 나온 사람이 없어 앞장 서 걷는 김감독은 계속해서 바닥을 나 뒹굴렀다. 마을까지만 가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들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마침내 마을로 들어서자 첫번째 집의 마당으로 김감독과 배영환이 뛰어 들어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 집엔 다행히 불이 밝혀져 있었다. 스텝들의 얼굴에 다소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도 안 계세요, 좀 도와 주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나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강은영이 소리쳤다.
"방문을 열어봐요, 불은 켜져 있잖아요!"
김감독이 방으로 다가가 방문을 왈칵 잡아 제꼈다. 그러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없어, 아무도 없어!"
"그.... 그럼, 어서 다음 집으로 가봐요, 어서!"
"다들 나누어서 사람들을 찾아 봅시다. 저기도 불켜진 집이 한 집 있잖아요"
우왕 좌왕하며 스텝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소리를 질러대며 사람들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사람도 보이질 않고 집들은 하나같이 텅비어 있었다. 스텝들의 얼굴에 다시 초조함과 불안함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불행히도 그들의 등뒤 어둠속에서 다시 짐승들의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왔어!"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거기도 아무도 없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두서없는 외침들이 어둠속에서 터져 나왔고 짐승들의 소리는 더욱 가까워 졌다.
"잠깐, 이리들 와봐요, 어서!"
겁에 질려 소리친 사람은 오세창이었다. 스텝들이 정신없이 그 곳으로 몰려 들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어느 집의 커다란 창고였다. 나무 문짝이 든든하게 잠겨있는 그 창고를 문틈으로 들여다 보던 김감독이 '헉'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해일이 앞으로 나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어둠속에 웅크린 마을 주민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까 그들을 찾아와 호통을 치던 노인들 세사람도 함께 있었다. 해일이 문짝을 힘껏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봐요, 문 좀 열어주세요, 좀 도와 주세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엔 김감독이 더욱 세게 문짝을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짐승들이.... 짐승들이 온다구!"
그때 등뒤에서 스텝들이 비명을 지르며 악을 썼다.
"악!"
"와....왔어, 놈들이 왔다구!"
"으으...... 저것들이 다 뭐야?"
강은영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고 촬영보 박희철도 사시나무 떨듯 부들 부들 떨었다. 과연 마당 바로 앞에는 흠뻑 비에 젖은 검은털에 눈에선 시퍼런 광채를 내뿜는 짐승들 수 십마리가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낸 채 금방이라도 스텝들을 향해 으르렁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 도대체 저것들이 어디서 나타난거야!"
"설마, 우리가 꿈을 꾸는건 아니겠지?"
참다 못한 박희철이 창고문을 정신없이 두드리며 악을 써댔다.
"문 열어, 이 새끼들아! 문 열란 말이야!"
이번엔 스텝들이 모두 달겨들어 문에 몸을 부딪히며 절박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그곳이 생사의 경계선이나 되는 것처럼.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제발!"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짐승들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6. 살아있는 유령(3)
"제발 문 좀 열어 주시오, 제발!"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짐승들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틀렸어, 우린 다 죽었다구, 다 죽었어!"
배영환이 울음을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박희철이 앞으로 두어걸음 나서며 옆에 있던 삽을 집어들곤 휘두르며 악을 썼다.
"덤벼, 이 새끼들아! 덤벼!"
나머지 스텝들도 짐승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때 어둠속 어디선가 해일이 불과 몇 분전 들었던 그 섬뜩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다시 들려왔다. 해일은 그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나타났다간 다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쉬익, 쉭! 쉭!"
약속이나 한 듯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름끼치는 쇳소리에 맞추어 놈들 중 한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박희철의 손을 향해 달겨들었다. 놀란 박희철이 삽으로 내려치는 찰나 그보다 앞서 짐승의 허연 이빨이 박희철의 손목을 낚아챘고 참혹한 비명소리와 함께 박희철의 손에서 삽이 떨어졌다. 박희철과 짐승이 한덩어리로 바닥을 나뒹굴렀다. 이번엔 주위를 맴돌던 또 한마리가 그에게 달겨들었다. 놈은 곧바로 박희철의 다리를 공격했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온 몸이 피로 물들었다.
이어서 또 한마리, 또 한마리...... 놈들은 스텝들의 동정을 살피며 침착하게 한마리씩 가세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여섯 마리가 동시에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박희철에게 달겨들었다. 서너 마리가 동시에 그에게 달겨 들었다. 끔찍한 광경 앞에 모두들 미친 듯 악을 썼다. 극도의 공포가 그들의 온 몸을 휘감아 왔다. 그러나 짐승들은 서로 박희철을 물어 뜯으려고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스텝들을 향해 더욱 다가섰다. 오세창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저것들은 귀신도 유령도 아닙니다. 끔찍한 괴물들이라구요! 이제 우린 다 죽은 목숨이예요. 다 죽었다구요!"
그의 말대로 해일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김한수의 공포와 두려움이 고스란히 그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두번, 세번..... 그러나 그건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총소리, 총소리였다. 짐승들 서너 마리가 순식간에 쓰러져 갔다. 그리고 나머지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스텝들은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세사람의 그림자가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구반장 일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맞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짐승들을 쫓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던 혜경은 마당에 있는 박희철의 시체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구반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요?"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직도 그들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해일이 아직도 굳어진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네, 저.... 전부입니다"
"마을 사람들..... 주민들은 어디 있소?"
"저기 창고속에....."
구반장이 스텝들을 헤치고 창고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나, 구희열입니다. 문 열어요. 이젠 우리도 대항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여전히 창고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번엔 저들이 모두 죽일거요. 더이상 우릴 살려두지 않을거라구!"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문을 부술듯 소리치자 비로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일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들을 찾아왔던 노인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나 데리고 가시오. 우리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소? 그리고 유령들을 상대로 우리가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이요? 우린 이 곳을 떠나지 않겠소"
"망할..."
구반장이 창고의 문을 주먹으로 후려치곤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혜경은 아직도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무기가 필요하다는 구반장의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갑자기 어디서 저렇게 많은 이상한 짐승들이 나타났는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구반장과 마을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지금의 괴이한 상황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확신이 그녀의 의식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캡모자를 눌러 쓴 창백한 표정의 해일이었다. "하두 정신이 없어 미처 감사하단 말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댁들이 아니었으면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할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윤혜경입니다. 이 곳 h군 경찰서에 있습니다. 다들 무사한가요?"
"보시다시피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 이 사람 말고도 이미 두명이나 죽었습니다"
"두명이 더 죽었다구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짐승들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전 그 끔직한 살인마를 봤습니다"
"살인마라구요?"
혜경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치자 구희열 반장이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직 끝난게 아니요!"
그 소리에 잠시 정신을 차렸던 스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들은 모두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김감독은 죽은 박희철의 시신 옆에 앉아 말이 없었고 이정우는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불안해했다. 그의 손엔 굵직한 몽둥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배영환과 강은영은 서로를 굳게 껴안고 있었다. 강은영은 남은 스텝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배영환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잠퍼를 벗어서 걸쳐 주었지만 어차피 비에 흠뻑 젖어버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구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흉가쪽 고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놈들은 다시 몰려 올 겁니다"
"그럼, 어서 저 창고 안으로 우리도 피신을 해야죠. 문도 튼튼해 보이고.... 어차피 짐승들입니다. 저 안까지 들어오진 못 할겁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그때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잖아요. 어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라고 하세요, 아니면 강제로라도....."
이정우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몽둥이로 창고문을 두들길 것 처럼 창고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구반장이 다시 소리쳤다.
"그만 둬요. 다 소용없어요. 그 안에 숨는다고 안전할 순 없어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구반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밤 안으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어차피 완전한 살 길은 아니지만....."
구반장은 계속 수수께끼 같은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참다못한 해일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구반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구반장이 이 이상하고 괴이한 일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대책을 강구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습니다. 경찰들이라고 하셨죠? 그럼, 우선 현재의 상황에 대해 저희한테 설명부터 해주십시요. 당신은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짐승들이 어디서 왔으며 아까 주민들에게 한 이상한 얘기들, 그리고 그 짐승들을 데리고 다니는 그 살인마는 누구인지....."
해일을 마주보는 구반장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긴장되어 있었고 주저하고 있었다. 혜경 또한 터질듯한 궁금증으로 그런 구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픈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구반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얘기였다.
"그것들은 모두 유령들입니다. 살아있는 유령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때 뒷쪽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채 떨고있던 오세창이 몹시 흥분하여 구반장의 앞을 가로막듯 나왔다.
"말도 안돼요! 지금 우릴 모두 놀리는 겁니까? 유령이라니요?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갑니다. 저건 귀신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끔찍한 괴물들이라구요! 괴물! 귀신이 사람을 저렇게 물어 뜯어 죽인다는 얘길 들어봤습니까? 귀신이 총에 맞았다고 죽었다는 얘길 들어 봤습니까? 나는 귀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지 저런 괴물을 만나러 온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내면에 억제되어 있던 공포심을 모두 발산하기라도 하려는 듯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구반장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몹시 겁이 많은 사람 같았다.
"경찰이면 어서 우릴 구해줄 생각을 해야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는 겁니까? 아까 조연출의 말대로 모두들 저 창고안에 숨으면 그만입니다. 뭐하러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합니까? 다들 정신들 차려요, 정신!"
해일이 오세창을 잡아 끌며 그를 진정시키려 햇다.
"우선 저 분의 얘길 들어봅시다. 어쨌건 우릴 구했잖아요"
그러나 그는 해일의 손을 뿌리치곤 이번엔 오히려 해일에게 화를 냈다.
"정pd 당신도 할 말 없어, 이 모든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한다구!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인이 있었다는 얘길 왜 안 했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로 그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이었다고 왜 얘길 않했냔 말야. 그랬으면 난 이곳에 따라오지도 않았을거야. 그때 죽은 사람들 모두가 바로 방금 죽은 박희철과 같이 물어 뜯겨 죽었잖소? 그런데 무슨 귀신을 찾으러 오냔 말야!"
그러나 그의 불만은 더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혜경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놈들이 다시 왔어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어둠속엔 아까보다 더욱 많은 푸른 광채들이 이쪽을 노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7. 필사의 탈출(1)
구반장이 m16을 잔뜩 움켜쥐곤 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행히도 더이상 입씨름할 시간이 없을 것 같소. 살고 싶은 사람들은 따라 오시오. 우리 윤형사와 박순경이 앞장을 서고 내가 맨 뒤에 따라 갈 것이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들려 주겠소. 물론 살아남은 사람만 내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오. 윤형사, 박순경! 어차피 다리가 끊어졌으니 내천리로 해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으니까 앞장을 서라구!"
"다리가 끊겼다구요?"
해일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물이 너무 불어서 다리가 무너졌소"
그리곤 말을 마친 구반장이 죽은 박희철의 손에 들려 있던 부삽을 빼내어 해일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남자들은 주위에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하나씩 잡으시오.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김감독은 낫을 잡았다. 기가 막힌듯 사람들을 바라보던 오세창이 무슨 짓이냐는 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거 아니야? 이 밤중에, 이 빗속에서 산길로 도망을 가잔 말이야? 다들 미쳤어, 미쳤다구! 더구나 다리도 끊겼다잖아! 우리가 살 길은 이 창고밖에 없다구, 다들 내 말 듣는거요?"
그러나 그의 말을 귀 담아 듣는 사람은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김감독이 그의 어깨를 툭치며 낮게 속삭였다.
"방금 저 양반이 여기 잇으면 죽는다 잖소? 살고 싶으면 시키는대로 하시오. 내 경험으로 이럴때 입씨름해서 득 본 경험이 별로 없으니까"
혜경이 맨 앞에서 렌턴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산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손에는 38구경 권총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괴물들이 달려들 것 같아 그녀는 계속해서 주위 어둠속으로 불안한 불빛을 쏘아댔다.
그녀의 바로 뒤를 따르던 박호철이 자신의 손에 들린 권총을 흔들어 보이며 애써 웃으며 말했다.
"윤형사님,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진 모르지만 맨날 책상에서 볼펜 굴리는 것보단 훨씬 신나는데요? 무슨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고.... 이럴줄 알았으면 좀 더 든든하게 무장을 해올껄 그랬나봐요"
앳띤 얼굴의 박호철이 그래도 농담을 던지며 보이는 여유가 혜경에겐 그나마 약간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모두들 최대한 앞 사람과의 거리를 좁혀서 뒤를 따랐고 구희열 반장만이 다소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불과 4. 5미터만 앞사람과 떨어져도 쉽게 길을 잃을 것처럼 시야는 온통 빗물과 어둠뿐이었다. 그때 뒷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구반장이 쏜 총성이었다.
강은영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 앉는 것을 배영환이 가까스로 부축했다. 강은영이 울먹였다.
"선배, 도저히 못 가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발이 안 떨어져요"
"여기서 주저 앉으면 안돼. 우린 무사히 빠져 나갈거야. 총도 있고 경찰도 있잖아. 설마 그까짓 짐승들이 뭘 어쩌기야 하겠어?"
배영환이 그녀를 위로하며 일으켰다. 그러나 그 역시 이 끔찍한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뒤에선 구반장의 좀 더 빨리 전진하라는 다급한 음성이 재촉하고 있었고 총소리도 계속 되었다. 처음 출발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진흙탕으로 변한 산길을 걷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오랫동안 억수같은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은 탓에 몸은 점점 더 무거워 지기만 했다. 해일이 앞쪽으로 나서서 혜경의 뒤로 바싹 붙었다.
지금은 박호철이 맨 앞에서 일행들을 이끌고 있었다.
"저기, 윤형사님이라고 하셨나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혜경이 고개를 돌렸다.
"네, 윤혜경입니다"
얼핏봐선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총명함과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해일은 그녀에게서 서울의 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가녀린 여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강인함과 고집스러움도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저를 보셨다구요?"
"그래요, 아까 윤형사님이 나머지 두분과 저희를 구하러 나타났을 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처음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그런데 지금 길을 걸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 친구가 이 곳에서 살인사건 취재를 위해 촬영해 온 테잎에서 보았더군요"
그녀는 해일이 자신을 테잎에서 이미 보았다는 말에 쑥스러운지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군요, 그럼, 그때 취재 왔던 기자가 친구분이세요?"
"네, 아주 절친한 친구였죠. 이번에 제가 이 곳에 온건 프로그램 제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의 죽음에서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한 점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점이라니요?"
"윤형사님은 아까 반장님이 말한 유령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세요, 저는 별로 그런 것들을 믿는 편이 아니라서..... "
"저는 그 유령이라는 얘기를 믿습니다. 제 친구는 죽기 전날 저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까 우리를 덮쳤던 그 괴물들이 어디를 가든 자신을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그것들 한테서 도망갈 수 없다고....."
혜경이 놀랍다는듯 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아까 목촌리 주민들이 한 말과 똑 같잖아요. 그리고 반장님도 그런 비슷한 얘길 했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얘깁니다. 어떻게 서울같은 도심에 저런 괴물들이 나타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 부분은 저도 진작부터 궁금해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괴물들이 어디서 나온지 아십니까? 바로 마을 건너편 흉가의 광속에서 나왔습니다"
"광속에서요?"
"분명합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독히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 광속에서 촬영을 할때만 해도 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괴물은 커녕 쥐새끼 한마리 없었단 말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하지만 정말 유령이라면 우리가 쏜 총에 그렇게 피를 흘리며 죽을 수가 있을까요? 그건 분명 우리가 흔히 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아참, 그리고 아까 누군가가 짐승들을 조종한다고 하셨죠?"
"네, 놈들이 우리 스텝중 한명을 죽였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긴 막대기 같은 것으로....."
"막대기라구요?"
"확실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게 죽창이라면 어떨까요?"
"죽.... 창이요?"
그때 뒷쪽에서 김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pd! 너무 빨라요. 잠깐 멈춰요!"
혜경과 해일이 뒤를 돌아 보았을때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어야할 배영환과 강은영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정우, 오세창, 김감독까지. 혜경이 앞쪽 박호철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박순경, 잠깐 멈춰! 이를 어쩌지? 우리가 너무 빨리 걸은 모양이군요"
혜경은 황급히 뒤쪽 어둠속으로 렌턴의 불빛을 쏘았다. 해일이 힘껏 소리쳤다.
"김감독님, 어디 계세요?"
그러자 뒤쪽 어둠속 약 20-30미터 되는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쪽에 있어요. 어디 옆길로 잘못 빠진 것 같아요"
"모두들 거기 있나요?"
"그래요, 하지만 그 반장이라는 양반은 여기 없고 아직 뒷쪽에 있는 것 같아요"
"김감독님, 그럼 저희가 데리러 갈테니까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중간 중간에 소리를 지르세요"
해일과 혜경, 그리고 박호철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소리만으로 찾아간다는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감독님, 저희들 불빛 보이시죠?"
"그래요, 보여요!"
"금방 갈테니까 그 곳에서 꼼짝말고 기다리세요"
세사람이 더듬거리며 산길을 헤쳐갈 때였다. 얼마간 잠잠하던 총성이 뒷쪽에서 다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김감독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강은영의 비명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들려왔다.
"정pd!서둘러, 놈들이 왔어! 시퍼런 광채가 보인다구. 아주 많아, 어서 서둘러!"
7. 필사의 탈출(2)
"기다려요, 금방 갈께요. 조금만 참아요!"
머리털이 쭈삣거리는 긴장감에 세사람의 발길이 더욱 바빠졌다. 어둠속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상황이 더욱 위급해져 가고 있음을 쉽게 짐작하게 했다.
"저리가 이 자식들아! 저리 가란 말이야!"
"살려줘! 제발! 살고 싶다구!"
"오선생, 이리 돌아와! 어서 돌아오라니깐! 오선생!"
그 이후로는 말 소리조차 제대로 알아 듣기 힘든 참혹한 비명과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두서없이 울려 퍼졌다. 괴물들이 일행을 덮친게 틀림없다고 세 사람은 생각했다. 모두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해일이 악을 쓰며 미친듯 앞으로 달려갈때 해일은 다시 어둠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쉬익! 쉭! 쉭!"
누군가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는 절박감이 느껴졌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소리치며 달렸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바로 앞쪽에 피런 광채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일은 그 중 한마리를 향해 삽을 휘두르며 달려갔고 혜경과 박호철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짐승들의 으르렁거림, 총소리, 악쓰는 소리, 비명소리. 해일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박호철은 거의 본능적으로 권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는 조준같은 것을 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그는 그저 총을 쏘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윤혜경 형사의 총은 정확하게 짐승들을 쓰러뜨렸다. 그녀는 지금 막 누군가를 덮치는 짐승 한마리를 또다시 쓰러뜨렸다. 그녀가 달려가 보니 김감독이었다. 그는 어둠속에서 아직도 낫을 휘두르며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혜경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모..... 모르겠소. 젠장, 놈들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오선생이 먼저 달아나기 시작하자 몇마리는 오선생의 뒤를 쫓고 나머지는 우릴 덮쳐 왔어요"
짐승의 발톱에 긁힌 그의 왼쪽 뺨에서 흐른 피때문에 그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박호철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그는 아직도 흥분한채 손에 쥔 권총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이..... 일단 놈들이 물러간 것 같아요. 저쪽에 세 사람 찾았어요. 지금 정pd와 함께 있어요.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안 보여요"
구반장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후였다. 일행중 김감독과 다리에 상처를 입은 배영환, 그리고 강은영만 찾았고, 이정우와 오세창이 보이질 않았다. 일행들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일행들의 앞에서 쓰러졌다. 그의 어깨는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의 동공은 거의 풀려 있었다.
"반장님, 정신 차리세요!"
혜경이 소리치며 그의 얼굴을 끌어 안았지만 그는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오.... 누구라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죽었소. 이젠 이 사람들을 윤형사가 책임져야 해! 당신들은 이제 모두 같은 배를 탄 거요! 무사히 이 밤을 넘긴다고 해도 놈들에게선 벗어날 수 없어요"
해일이 그의 옆에 주저 앉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젠 알려 주세요.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건지...."
그는 대답 대신 혜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게 다 업보야. 그동안 난 너무 힘겨운 싸움을 해왔어. 윤형사, 이 일에 윤형사를 끌어 들이고 싶진 않앗는데 어쩔 수 없이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군. 내 책상 서랍에 보면 낡은 노트가 한 권 있을거야. 그걸 보면 그 동안 이 곳 목촌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거야"
그는 가뿐 숨때문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목촌리 사람은 자신이 가야할 운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어차피 난 죽을 몸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날이 밝을거고 그럼 더이상 놈들은 나타나지 않을거야.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모든게 끝나는게 아니란거야. 지금의 이 끔찍한 일들은 길고 지루한 악몽의 시작일뿐이야. 윤형사! 가능하면.... 내 노트는 읽지 말어. 오히려 절망만 더 깊어져서 괴로울테니까. 노트를 보면 결국 우리 모두가 죽게 된다는걸 믿고 말테니까. 그래서 자살한 사람들도 무척 많지.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군. 자, 시간없어! 어서들 가라구! 내가 시간을 좀 벌어 볼테니까!"
"반장님, 이제와서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가야죠, 함께!"
혜경이 구반장의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일으켜 옆에 나무기둥에 기댔다. 그리곤 그의 m16을 움켜쥐고 어둠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버틸진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 같군. 그리고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여기 있는 사람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생각 하지마! 어느 누구도 자네들을 도울 수 없다구!"
"반장님!"
혜경은 그의 옆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구반장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장승처럼 꼼짝않고 어둠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호철이 혜경을 일으켜 세우며 구반장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일행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시작했다. 새벽 5시 40분.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것이다. 그들이 구반장과 헤어진 후 채 5분도 되지 않아 뒷쪽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총성이 완전히 멎은 것은 약 10여분 뒤였다. 혜경을 비롯한 일행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강은영도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녀는 밤사이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강은영만이 아니었다. 해가 떠오른 것은 새벽 5시 50분경이었다. 그들은 태어나 그렇게 아름다운 새벽을 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토록 긴 밤을 보낸 기억이 그들에겐 없었다. 그것은 지루하고 끔찍한 악몽과 같았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긋지긋 하던 빗방울도 멎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여명이 대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잔혹한 어둠이 물러가고 숲은 다시 초록빛을 찾으며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일행들이 하나 둘 진흙탕 위에 주저 앉았다. 스텝들 아홉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네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뿌연 아침이 밝아오는 목촌리를 돌아보며 제각기 감회에 젖어들고 있었다.
* * *
평화로운 휴일 아침 h군은 발칵 뒤집혔다. h군의 한 산골 마을 목촌리에서 유례없이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을에는 간밤의 참상을 말해주듯 곳곳에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집단살육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죽음의 그림자가 온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수십명의 경찰과 검은 양복을 입은 몇 명의 사내들이 철저한 보안속에 마을을 조사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토록 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언론에서 나온 취재기자 한 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제일 먼저 만난 시신은 구반장의 시신이었다.
그는 가슴에 m16을 굳게 껴안은채 온몸이 갈기 갈기 찢겨져 있었다. 이 정우의 시신은 숲속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다. 그는 죽창으로 무수한 가격을 받은 듯 온 몸이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오세창의 시체는 개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그외에도 박희철과 김혜진의 시신이 각각 마을과 흉가에서 발견되었고 특히 광속에서 발견된 이정란의 시신이 가장 참혹했다. 뜻밖에도 창고에 숨어 있던 마을 주민 다섯명은 모두 농약을 먹고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해일은 마을의 한가운데 주저앉아 경찰들이 여기 저기서 한곳으로 모아 오는 시신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전만 해도 그들은 자신과 함께 얘기하고 숨쉬던 사람들이었다. 김감독과 배영환은 부상이 심해 앰블런스편에 급히 서울로 후송되었고 강은영 또한 거의 탈진상태로 서울로 보내졌다. 윤혜진 형사는 구반장의 시신을 대하곤 심하게 오열했으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을 시경에서 내려온 형사팀들에게 간밤의 상황들을 설명하느라 기진맥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박호철 순경이 그녀의 주장들을 재차 확인시키고 있었지만 형사팀들중 누구 한사람도 그들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 다음으로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해일이었다. 하지만 해일은 그들에게 어떻게 간밤의 상황을 설명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참혹한 시신들을 제외한다면 마을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분명 마을에는 박희철에게 덤벼들던 짐승들과 마을을 벗어나 탈출하던 과정에서 죽인 짐승들의 시체가 있어야 하는데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마을 어느 한구석에서도 짐승의 발자욱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7. 필사의 탈출(3)
만약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그들 모두는 기나긴 악몽을 꾼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도 믿을 만큼 마을은 완전하게 깨끗했다. 해일은 이 곳에 분명 엄청난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아무리 흔적을 없애려고 해도 이토록 완벽하게 처리할 순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해일의 어깨를 툭하고 치는 사람이 있었다. 올려다보니 그는 이번 수사팀의 책임자라고 처음에 자신을 소개하던 장형석 과장이었다.
"기분이 좀 나아 졌습니까?"
해일은 그의 말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큰 충격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는 해일의 옆에 비슷한 자세로 주저 앉았다.
"정pd라고 하셨죠? 오랫동안 이 방면의 일을 해오면서 이번처럼 이상한 사건은 처음 대합니다. 죽은 사람들로 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진술로 보나 오늘 새벽 이 마을에선 웬만한 전쟁보다 더한 난리가 벌어진 것 같은데 제 눈에는 마치......"
그는 잠시 거기서 말을 끊곤 해일의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마치 어디선가..... 엉뚱한 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고스란히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해일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 경찰들과는 달리 말쑥한 양복 차림에 1970년대에나 유행했을 짧고 단정한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긴 그의 모습에서 해일은 한때 이 나라를 온통 두려움에 떨게 했던 모 기관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해일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해일은 그가 자신들의 얘기를 믿기는 커녕 오히려 의심에 가까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입니까?"
"아... 제 말을 오해 하셨나본데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니라면.... 제가 장형사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건, 아니죠. 비록 정pd가 이번 일에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피해자라고 주장한다구요?"
"이런, 제 말을 너무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물증이나 확실한 정황이 밝혀질때까진 선입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 뿐이니까요"
"결국은 우리들을 용의자로도 볼수 있다 그 말이군요"
"꼭 그렇게 해석하고 싶으시다면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수사 절차상 어느 사건에서나 사건 주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용의자 선상에 올리는 것이 수사를 하는 기본 방침이니까 이해해 주십시요"
"저쪽에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은 다름 아닌 경찰입니다"
"그건 별개의 문제지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pd가 이번 사건에 대해 저희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의 말은 전과 달리 이번에는 매우 확고하고 단호한 억양이었다. 해일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미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얘기했는데. 그들은 또 무엇을 더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그는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자신이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자 앞쪽에서 윤혜경 형사가 자신과 장과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지금 자신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해일은 그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혜경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여느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었다. 해일은 처음 그녀를 대할때부터 그녀에게서 어느 남자 못지 않은 강인함과 고집스러움을 엿볼 수 있었다. 해일은 그것이 단순히 그녀의 직업때문에 드러나는 성격이 아닌 그녀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요? 마을이 말입니까?"
"아니요, 경찰들..... 아니 이 사람들.... 일반 경찰들이 아닌 것 같아요"
"뭐라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히는모르겠지만 시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차림새나 말투, 그리고 시경 어느 부서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선 밝히지도 않고..... 신분증도 위조된 것 같아요"
"뭐라구요? 그게 정말 입니까?"
"뭔가 또 다른 무엇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따져야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냥 잠자코 있으세요. 우리가 먼저 속을 드러내서 득이 될게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속아 주는 척 하면서 저들의 정체와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구요"
해일은 새삼스레 주변의 인물들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무엇이라고 분명히 단정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그들은 일반 경찰들과는 다른 어떤 낯선 분위기가 있었다.
"어차피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우리가 쉽게 현실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마치 현실처럼 벌어지고 있었어요. 분명 어딘가에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거예요. 그걸 찾는게 급선무예요. 혹시 흉가에서 촬영을 할때 카메라에 뭐 찍힌게 없을까요?"
그녀의 말에 해일의 머리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래요, 촬영 테잎! 만약 김감독이 카메라를 끄지만 않았다면 광에서 이정란씨가 죽어가는 모습과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뭐죠?"
혜경을 바라보는 해일의 얼굴이 흥분으로 상기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짐승들과 살인마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몰라요"
"네? 그게 정말이예요?"
해일은 혜경과 흉가 쪽으로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돌연한 두 사람의 행동에 장과장이 덩달아 급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해일이 달리며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래요, 만약 김감독이 그때 광을 뛰쳐 나오며 카메라를 끄지만 않았다면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 살인마와 짐승들이 광에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제 두 눈으로 보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광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광에는 저희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구요. 제가 본 것처럼 그들이 정말 광에서 나왔다면 우리가 나온 이후에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촬영 테잎에 찍혔을거란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 모든 수수께끼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뿐이 아닙니다. 마당에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어요. 그 카메라는 야간에 조명이 없이도 물체들을 분명하게 촬영을 할 수가 있죠.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이 되었다면 우리가 광에서 뛰쳐 나오는 과정들과 짐승들과 살인마의 모습, 그리고......"
해일의 목소리에 갑자기 흥분기가 가셨다.
"그리고 뭐죠?"
"김혜진의....... 살해장면까지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을 겁니다"
8. 테잎속의 비밀(1)
일요일 오전 같은 시각. 서을 근교 m 정신 요양원에는 3대의 앰블런스와 검은 세단 3대가 급히 요양원 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은 환자 몇 명과 면회 온 보호자들이 따스한 햇살 아래 도시락이라도 나누며 모처럼 한가로운 정을 나누고 있 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쥐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는 뜰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세단과 앰블런스가 요양원 현관 앞에 멎자 기다렸다는듯 요양원의 원장을 비롯한 실무자들이 급히 그들을 맞으러 밖으로 나왔다.
첫번째와 두번째 세단에서 내린 사람들은 검은 양복 차림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기관원의 인상을 풍기는 사내들이었고 세번째 세단에서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앞 차에서 내린 사내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사내들이 내렸다.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앰블란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환자 한명이 하얀 시트로 온 몸이 덮힌채 환자용 침대에 실려서 끌어 내려졌다. 사내들은 신속하게 환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두번째, 세번째 앰블런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시트로 온몸을 뒤짚어 씌운 환자가 각각 한명씩 실려 있었고 그들 또한 앞의 환자와 같은 방법으로 안으로 들여 보내졌다. 그들을 태운 환자용 침대는 빠른 속도로 햐얀 벽으로 둘러싸인 정신 요양원의 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복도를 질주하는 동안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병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은밀한 통로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의 입구에는 '특수병동'이라는 푯말과 함께 '관계자외 절대 출입금지' 라는 선명한 붉은색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다시 두개의 굳게 잠긴 철문을 지나 병원 가장 깊숙한곳에 위치한 세개의 병실 앞에서 각각 멈추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병실문이 열리고 각각의 환자들을 실은 침대는 나란히 배정된 병실 안으로 들여보내 졌다. 병실 안은 여느 병실과 달리 각각의 병실 사이의 칸막이가 유리같은 투명한 재질로 제작되어 옆 병실의 환자를 서로 볼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화까지 나눌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되어 있었다.
사내들은 미리 충분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지침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듯한 자가 눈짓을 하자 건장한 사내들은 곧바로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남은 사람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침대위에 환자가 꿈틀거리는 동작이 하얀 시트위로 불거져 나왔다. 첫번째 병실에 들어간 환자의 시트가 벗겨졌다. 환자는 침대에 단단한 밸트로 손발이 고정되어 있었으며 입에는 테잎이 붙여져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사내들을 두려운 눈으로 올려다 보는 그는 뜻밖에도 김익재 촬영감독이었다.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침대의 시트가 벗겨지고 그 안에선 배영환과 강은영이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 * *
놀랍게도 흉가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던 60분짜리 적외선 카메라의 테잎도, 광안에 설치되어 있던 eng 카메라의 테잎도 모두 끝까지 감겨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해일이 흥분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됐어요, 모든 장면들이 이 안에 촬영되어 있을 겁니다. 오늘 새벽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의 곁에 있던 상기된 표정의 장과장이 말했다.
"지금 여기서 볼 수 있습니까?"
"그럼요, 체크 모니터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카메라에 연결하면 여기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해일이 막 모니터 케이블을 카메라에 연결하려 할 때였다. 장과장이 해일의 손길을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장 여기선 곤란합니다. 이번 사건은 철저한 보안속에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럼, 어디서 봐야 한단 말씀입니까?"
"테잎을 좀 정밀하게 분석을 해야 하니까 번거롭겠지만 저희하고 같이 동행을 좀 해 주셔야 겠습니다"
뒤에서 두사람을 지켜보던 혜경이 납득이 안간다는 표정으로 끼어 들었다.
"동행이라니요? 어디로요?"
"그건 가 보시면 압니다"
그러자 혜경이 정색을 하며 따지고 들었다. 뭔가 내면에 억눌려 있던 불만을 터뜨리듯 그녀는 매우 공격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예요? 저희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함께 동행할 수 없어요. 그리고 설사 어디로 가는지 안다해도 영장없이 한발자욱도 함께 갈 수 없어요. 저희를 마치 이번 사건의 용의자나 되는듯이 취급하는데 저희 는 엄연히 신고자고 피해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 테잎도 엄연한 정pd님의 소유물이고.... 저희가 이 테잎을 장과장님과 함께 보려는 것도 수사에 협조하는 차원이지 의무는 아니죠. 정pd님, 그 테잎 그냥 이곳에서 확인해봐요"
혜경의 말에 장과장의 안색이 금새 굳어졌고 해일은 잠시 망설이다 케이블을 카메라에 꽂았다. 그리곤 카메라에 붙은 재생 버튼을 막 누르려고 할 때였다. 해일의 얼굴 앞으로 낯선 물체가 들이 밀어졌다. 그것은 뜻밖에도 권총이었다. 해일과 혜경이 동시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죄송합니다. 두 분을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정식으로 체포하겠습니다"
장과장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나 엉뚱한 그의 말에 해일과 혜경은 어이가 없다는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이윽고 혜경이 얼굴까지 붉게 상기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바....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우리가 이번 사건의 용의자라구요?"
그러자 장과장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아까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건장한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박수사관! 이리 좀 와봐!"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벌써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들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란걸 알아차린 해일이 놀라 소리쳤다.
"저기, 자.... 잠깐만요! 뭔가 오해가....."
그러나 장과장의 눈초리는 이미 조금전과는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사뭇 위협조로 해일과 혜경에게 번갈아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더구나 그의 말투는 어느새 거친 반말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 그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혼날줄 알아!"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해일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혜경이 당혹감을 억누르며 그에게 대들며 소리쳤다.
"당신들 도대체 누구죠? 당신들..... 경찰이 아니죠?"
"입다물어, 너희들은 이번 사건의 살인 용의자들이란 말야!"
그 사이 장과장이 부른 박수사관이라는 사내가 와서 혜경의 뒤쪽에서 권총을 들이 밀었다. 장과장이 해일에게 명령하듯 소리쳤다.
"카메라에서 테잎 꺼내!"
해일이 혜경을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해일의 바로 코앞까지 들이 밀어졌다.
"테잎 꺼내라는 말 안들려?"
해일은 어쩔 수 없이 두개의 카메라에서 테잎을 꺼내 그에게 넘겨 주었다. 그는 급히 테잎을 자신의 바바리 코트 안으로 집어 넣은 다음 두사람에게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허튼 짓 하면 그 자리에서 황천길일줄 알아!"
그들이 흉가를 벗어나 마을을 가로지르는 동안 어느 누구도 그들을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옷속에 권총을 숨긴채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보이도록 최대한 신경을 쓰며 두사람을 마을에서 데리고 나왔다. 마을을 벗어나자 그들은 두사람이 5, 6미터 앞장 서 걷도록 한 다음 뒤에서 따라왔다. 해일은 자꾸만 자신의 등뒤를 겨누고 있을 권총이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두사람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해일의 마음을 알아 차렸는지 혜경이 속삭였다.
"뒤돌아 보지 말아요. 우릴 해치거나 하진 않을테니....."
"그걸 어떻게 알죠?"
"저들도 테잎을 보면서 우리의 설명이 필요할거니까, 그리고 우릴 죽일 의도였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고....."
"대체 저들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걸까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정부 어느 특수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이번 사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이번 사건을 조사할때도 모정보기관에서 제 뒷조사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모르긴 몰라도 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훨씬 이전부터 이번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는 사이 그들은 이미 마을 입구에 있는 비포장 도로까지 도착해 버렸다. 거기에는 여러대의 경찰차와 승용차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들은 그 중 한대의 승용차 문을 열고 권총을 든 손으로 두사람에게 타라는 손짓을 했다. 해일과 혜경이 망설이다 차에 오르려는 순간 네사람의 뒷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혜경의 귀에는 몹시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모두들 꼼짝 마! 앞에 두 사람 얌전히 총 버려! 어서!"
8. 테잎속의 비밀(2)
사내 하나가 몸을 뒤로 돌리려 하자 목소리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등짝에 구멍나기 싫으면 고개 돌리지 않는게 좋을거야. 얌전히 총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을 머리에 얹으라구....."
사내들이 어쩔 수 없이 시키는대로 하자 목소리가 이번에는 해일과 혜경쪽을 향해 소리쳤다.
"앞에 두 사람 천천히 뒤로 돌아!"
잔뜩 긴장한채 뒤로 돌던 혜경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는 바로 박호철 순경이었던 것이다. 혜경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박호철이 눈을 찡긋하며 조용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그리곤 땅에 있던 끈을 집어 던지며 말했다.
"거기 앉아 있는 두 사람 묶어!"
혜경과 해일이 빙긋 한번 웃곤 주저앉은 장과장과 박수사관을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혜경이 소리쳤다.
"자, 이젠 뭘 하면 되죠?"
그러자 박호철이 특유의 앳띤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뭘하긴요, 바닦에 권총 들고 달아나야죠!"
혜경이 반갑게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 사람들이 좀 이상하더라구요. 이 두사람 말고 또 한사람 있었잖아요. 감색 양복 입은 사람.... 그 사람이 줄곧 저를 감시하질 않겠어요? 그래서 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데 윤형사님과 정pd님이 이 두사람과 마을을 벗어나는걸 봤는데 뭔가 낌새가 수상쩍어서 유심히 보니까 이 두사람한테 잡혀 가는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를 감시하던 사내한테 소변 좀 보고 온다고 하곤 줄행랑을 쳐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혜경이 놀랍다는듯 박호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박순경, 항상 어린애 같기만 하더니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닌데?"
말을 마친 혜경이 허탈하게 주저앉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자, 장과장님, 이제 당신들이 누군지 한번 말을 해 보실까요?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왜 데려갈 셈이었죠?"
장수사관이 조금도 굽히는 기색없이 대답했다.
"우린 당신들을 보호하려는 것 뿐이었소. 다소 절차상에 무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소리 말아요, 우리도 자신의 몸 하나 지킬 정도의 여력은 있으니까 어설프게 우릴 보호하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집어 치워요. 엉뚱한 소리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들은 k기관 정보원들이예요"
박호철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신분증 두개를 꺼내들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미리 와서 그들의 차를 조사해 봤거든요"
해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k기관 정보원이 왜 우릴?"
혜경이 장과장의 안주머니에서 촬영테잎을 꺼내들고 윽박질렀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예요, 그렇죠? 당신들은 처음부터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었던 거죠, 안그래요?"
"우리도 아직 분명하게 아는건 아무것도 없소. 단지 이번 사건이 우리의 능력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어떤 현상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 밖엔....."
"초자연적인 현상? 설마 당신도 우릴 습격한 그것들이 귀신이니 유령이니 하는 것들의 짓이라고 말하려는건 아니겠죠?"
"물론 그건 아니오. 하지만 당신들이 당한 일이 현실에선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며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오.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앞으로 단 몇 일도 버티기 힘들 것이오. 그곳을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당신들도 잘 알텐데?"
그의 말에 세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해일이 침울하게 물었다.
"그럼, 당신들이 뭘 할 수 있다는거죠?"
"우선은 그 초자연적인 현상이 어떤 것인지 좀 더 명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당신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면밀하게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혜경이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다.
"결국 우릴 실험대상으로 쓰겠단 얘기군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변명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당신들이 현재 우릴 구할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현재로선 그렇지만....."
"그렇다면 혹시.... 병원으로 간 김익재 감독이나 배영환, 강은영씨도?"
그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 분들은 이미 우리의 보호하에 안전하게 있소"
해일과 혜경의 이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박호철이 끼어들었다.
"이제부터 우린 어쩌죠? 저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다시 장수사관의 얘기가 이어졌다.
"현재 우리 기관에선 이번 사건을 위해 저명한 물리학 박사를 비롯, 많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한 기구를 만들었소. 그들이 당신들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거요. 만약 지금 당신들의 잘못된 생각으로 이 자리를 이탈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 질 것이오"
혜경이 결심이 선 듯 두사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당신네들의 보호같은 건 필요없어요. 그리고 당신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부터가 틀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당신들을 신뢰할 수가 없고..... 그리고 지금 당신들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 당장 풀어주는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린 이 사실을 온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릴 테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여간 곤란한게 아닐껄?"
"멍청한 짓 말아요. 그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오. 당신들은 이번 사건의 핵심을 아직 파악조차 못하고 있소"
그러자 혜경이 승용차에 올라타며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건 우리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끔찍한 악몽에서 어떻게 깨어 나느냐 하는 것이니까"
* * *
통제실에는 병실 마다 은밀하게 설치된 두개의 카메라를 통해 병실 내부의 모든 상황을 여섯개의 모니터가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배영환이 벌서 5분이 넘게 병실의 방문을 두들겨대며 소릴 지르고 있었다.
"이 자식들아, 우릴 내보내 줘!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 이렇게 가둬 놓은 거야! 당장 우릴 내보내 달란 말이야!"
그러나 번번히 되돌아 오는 것은 공허한 그의 메아리뿐이었다. 참다못한 김감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둬! 그래봐야 소용없어!"
"그럼, 이대로 주저앉아 있잔 말씀이세요?"
김익재 촬영감독이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둔 배영환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놈들이 우릴 관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뭐라구요?"
배영환이 방안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카메라 같은건 보이지 않잖아요?"
"카메라쯤 숨기는건 일도 아니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대체 저들이 누구이며 우리를 왜 이리 데리고 왔는가 하는거야"
"아무래도 간밤에 저희가 당한 일과 관련이 있겠죠. 전 불안해서 아주 죽을 지경이예요. 산넘어 산이라더니.."
"은영씨는 어때? 아까부터 구석에 주저앉아 아무말도 없잖아. 한번 가봐"
"여러모로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개자식들 어떤 자식들이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감금을 하는지.... 만약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이것들을 그냥...."
"쓸데없는 소리말고 은영씨한테나 가봐. 과연 무사히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 예감에 여긴 보통 곳이 아냐"
배영환이 자신의 우측에 있는 강은영의 방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사이에도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무릅 사이에 고개를 묻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선 더이상 예전의 밝고 활기에 넘치던 모습을 찾아볼 순 없었다.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곤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강은영? 괜찮아?"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무릅 사이에 묻은채 아무 말이 없었다.
"강은영, 이런 때일수록 기운을 내야지! 은영씨, 내 말 듣는거야?"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배영환을 돌아 보았다. 파리한 그녀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뭉클하고 저리게 만들었다.
"선배,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죠? 이게 뭐예요? 마치 무슨 동물 실험실에 갇힌 것 처럼..... 우린 결국 모두 죽을 거예요. 마을 주민들도 그랬고, 구반장님도 그랬잖아요"
"바보같이 우리가 죽긴 왜 죽어? 아직 시집, 장가도 못 갔는데...."
"이 판국에 지금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예요? 그렇게 장가가고 싶은 사람이 뭐 하느라 아직 노총각이예요?"
"장가는 뭐 아무나 가나? 나같이 고리타분하고 구시대 사람을 누구 좋다고 하겠어?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데....."
"선배가 뭐가..... 어떻다고 그래요? 그만하면.... 인정 많고, 사람 착하고..... 뭐 결혼이 별건가요? 서로 마음 맞으면 대충 살면 되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은영씨는 왜 아직 결혼 않했어? 이제 결혼할 나이 됐잖아! 주위에 남자도 많던데....."
"저요? 후후.... 남자가 많으면 뭐해요? 다들 친구고 동료고 그런 사람들이지 정작 애인은 없어요. 오히려 저 같이 겉보기에 번지르한 애들이 사실은 실속이 없다구요"
강은영은 짐짓 풀이 죽은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도도해 보이던 평소 그녀에게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또한 그는 예전에 그녀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자신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뜻밖에 그에게 상당한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는 이번이 아니면 앞으로 영원히 자신의 본래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 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으..... 은영씨, 있잖아.... 나 어때?"
배영환의 더듬거리는 말투에 강은영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 보았다.
"뭐.... 가요?"
"나.... 어떠냐구? 그러니깐..... 은영씨가 보기에 내가 어떠냐구. 객관적으로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구 바로 강은영씨가 보기에 나라는 남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거야"
강은영은 갑작스런 배영환의 얘기에 그 의미를 알아내느라 애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말의 진정한 의미를 눈치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굴에 나타난 그녀의 당혹스런 표정만으로도 그는 그것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몹시 덤벙대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 배영환에겐 십년도 더 되는듯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배 지금 저한테..... 프로포..... 즈 하는 거죠?"
배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8. 테잎속의 비밀(3)
"글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알기론 선배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아, 나도 처음엔 그게 미움인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나도 내 자신의 이런 감정을 알고 스스로에게 몹시 놀랐어. 은영씬 나같은 사람이 넘보기엔.... 뭐랄까..... 훨씬 잘 나가는 여자잖아. 그리고 은영씨에게 난 너무 어울리지도 않고....."
강은영의 얼굴에 멎적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선배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선배같은 사람이 나한테 그런 감정을 가졌단 말예요?"
강은영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볼때 배영환은 역시 그녀는 자신의 여자가 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에게도 말로만 듣던 사랑의 아픔이라는 낯선 상처가 찾아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얘기는 전혀 그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선배는 정말 바보예요.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지 왜 구박을 해요? 좋다고 말하면 제가 딱지라도 놓을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배영환이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실은 저도 선배한테 뭐랄까....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맨날 구박만 하니까 선배는 저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줄 알았죠"
"저.... 정말이야? 지금 한 얘기가 정말이냐고?"
배영환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은영이 기겁을 하면서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곤 속삭였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우린 지금 갖혀 있다구요. 그리고 바로 옆방에 김 감독님도 있는데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요?"
"아무려면 어때, 차라리 이렇게 갖히게 된게 난 오히려 잘된 일 같아. 안 그랬으면 아마 난 영원히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 했을거야. 고마워, 은영씨. 고마워!"
배영환은 자신과 강은영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벽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필경 강은영을 있는 힘껏 껴안고 말았을 것이다.
* * *
모니터를 지켜보던 우일만 박사가 장수사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물리학 분야의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테잎도 가져 오지 못했단 말이요?"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안에 그들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낭패군, 테잎이 있어야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좀 더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을텐데.... 손박사 생각은 어떻소? 아직도 목촌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무속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박사가 질문을 던진 사람은 뜻밖에도 처음 해일이 테잎을 들고 찾아갔던 손남의 박사였다.
"아닙니다. 저 역시 지금은 우박사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밤 그들이 저 사람들을 찾아오겠군요?"
"아마 내 추측이 맞다면....."
"그래도 너무 잔인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론?"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오. 이미 달아난 세사람도 마찬가지고. 몇 일 더 버틸 수 있을진 몰라도결국에는....."
* * *
경찰서엔 마침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의경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급한 서류를 찾으러 왔다고 둘러대곤 구반장의 서랍을 뒤쳤다. 구반장의 말대로 그의 서랍속에서는 과연 보통 노트 두께의 서너배는 됨직한 두껍고 낡은 노트가 나왔다. 혜경이 그것을 가슴에 소중히 숨기고 막 사무실을 나오려고 할 때였다. 둘중 고참되는 김한민 수경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윤형사님, 죄송합니다. 지금은 여길 나가실 수 없습니다"
"김수경!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나갈 수 없다니?"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만약 윤형사님이나 박순경님이 돌아오면 잡아두라는....."
"아니, 왜 나를 잡아 두라는거지?"
그러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했다.
"그게....저..... 현재 윤형사님은 살인용의자로 수배중입니다"
"뭐... 뭐라구? 살인 용의자?"
"그렇습니다"
이번엔 뒤에 서 있던 이영운까지 가세하며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손엔 벌써 은빛 수갑이 들려 있었다.
"너.... 너네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꺼야?"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김한민이 이영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갑 채워!"
이영운이 쭈삣거리며 막 혜경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 할 때 혜경의 팔꿈치가 그의 턱을 올려쳤다. 이영운이 '욱'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턱을 감싸쥐며 뒤로 물러섰다. 놀란 김한민이 '어....어?'하는 사이 이미 혜경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어떤 자식들인지, 까불지들 말라 그래! 이 윤혜경이를 그렇게 호락 호락하게 봤다간 큰 코 다칠 줄 알라는 말도 꼭 전하라구, 알았어?"
그녀는 하얗게 질린 김한민을 남겨둔 체 날쌔게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경찰서 밖 차안에는 해일과 박호철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숨을 몰아쉬며 차안으로 뛰어든 혜경이 소리쳤다.
"어서 출발해요!"
그녀의 소리에 맞춰 해일이 엑셀에 힘을 주자 차는 급한 가속음을 뒤로 하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찾았어요?"
해일이 뒤로 돌아보며 물었다.
"네! 근데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는 건 위험한 것 같아요. 이미 우리 세사람에 대해 전국에 수배령이 내린 모양이예요"
박호철이 말도 안된다는듯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무슨...."
"지금 그런거 따질 때가 아냐. 서울로 가는게 낫겠어요. 이곳은 바닥이 워낙 좁아서 마땅히 숨을 곳도 없다구요"
해일이 대답했다.
"그럽시다. 테잎도 보고 하려면 나도 이곳보단 서울이 편하니깐....."
그들이 서울에 닿은 것은 밤 9시가 넘어서 였다. 아무래도 집이나 방송국 쪽에는 이미 기관원들이 깔려 있을 것 같아 강남에서 프러덕션을 하는 후배를 찾아갔다. 밤 늦은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해일의 후배 이근택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해일 일행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일형, 이 밤중에 무슨 바람이야? 바쁜 사람이 날 다 찾아 오고?"
"여기 혹시 나 찾아온 사람 없었냐?"
"에이... 참 형두..... 여기 형 찾아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근택아, 부탁 하나만 하자. 오늘 나 너네 편집실 좀 쓰면 안되겠냐?"
"방송국 편집실은 어쩌구?"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한번만 좀 봐주라!"
"글쎄..... 좋아, 그럼. 대신 다음에 술 한잔 사야 돼! 나갈때 알지? 그냥 문 닫고 나가면 자동으로 문 잠기니까"
세사람만 편집실에 남자 해일은 서둘러 테잎을 꽂았다. 먼저 볼 테잎은 광속에서 찍은 테잎이었다. 이정란이 굿을 하는 모습이 제일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가 귀신을 부르겠다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의 이마에 번지르하게 땀이 번질 무렵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신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사람은 잔뜩 긴장한채 화면을 주시했다. 막 이정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혜경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
해일이 소리쳤다.
"이 다음 부분을 잘 봐요"
해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광의 안쪽 벽면에서부터 푸른기가 도는 연기 같은 것이 이정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정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오세창의 뭔가 잘못됐다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박호철이 흥분하여 말했다.
"저게 뭐죠?"
광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오세창이 어서 끌어 내리라며 소리를 지르자 스텝들이 이정란에게 달려 들어 그녀를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나왔다. 해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땐 정말 장정 네사람이 달겨 들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더라구요"
이정란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가고 스텝들의 우왕좌왕하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그러다 이정란을 붙들고 있던 스텝들이 한거번에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고 찢어지는 이정란의 비명쇠와 함께 그녀의 몸이 무엇인가에 물어 뜯기듯 옷 밖으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새어나왔다. 박호철은 테잎을 보면서 연신 몸을 떨었다.
"어떻게 저럴수가....."
김혜진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스텝들이 광에서 뛰쳐 나가는 모습이 부분적으로 카메라에 잡혔고 누군가 뛰쳐 나가며 카메라를 건드렸는지 카메라의 앵글이 살짝 돌아가서 이정란의 모습은 카메라에서 사라졌다. 대신 카메라는 광의 안쪽 벽과 함께 이정란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해일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일은 아직도 당시의 섬뜩함이 되살아 나는지 목을 움츠렸다. 마침내 해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쫓기듯 광에서 빠져 나오자 벽을 비추는 광안에는 이정란의 헐떡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해일이 긴장하여 소리쳤다.
"바로 이겁니다!"
세사람은 뚫어지게 화면을 쳐다 보았다. 붉은 톤이 도는 광 안쪽 벽에서부터 희미한 안개가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혜경이 소리쳤다.
"그 날밤에도 저런 안개가 있었어요, 그렇죠?"
해일이 대답했다.
"제 친구가 죽기 직전에 제게 전활해서 그랬어요. 안개가 보이면 놈들이 나타난 증거라고....."
안개의 농도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고 뭔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선명하진 않앗지만 세사람은 모두 그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푸른 광채가 도는 눈들..... 그들은 그 끔찍한 짐승의 눈들이었다. 박호철이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예요. 저것들이 어떻게 나타난거죠? 어디서 나타난거죠?"
해일이 그 부분의 테잎을 다시 되감아서 재생시켜 보았지만 놈들은 푸른 빛 도는 안개속에서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고 마치 광 안쪽 어딘가에 숨어있는 다른 세계에서 바깥 세상으로 달려 나오듯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선 해일의 눈을 번쩍이게 하는 바로 그 살인마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놈의 손에는 예의 기다란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윤곽 정도만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지만 해일은 그가 바로 그날밤의 살인마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테잎은 거기서 끝이 났다. 세사람 모두 충격에 휩싸여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혜경이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장수사관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요. 이번 사건이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던 말 말이예요"
해일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요.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벽속에서 저런 것들이 튀어 나올 수 있는지.... 유령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일단 두번째 테잎도 보자구요"
두번째 테잎이 틀어졌다. 해일로선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은 테잎이었다. 테잎의 시작은 억수처럼 내리는 폭우속에 유령처럼 버티고 선 흉가의 전경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쏟아붓듯 내리는 폭우를 보자 세사람은 금방 간밤의 그 지루하고 끔찍했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해일이 빨리감기로 테잎을 뒤로 돌리자 테잎에는 정신없이 광에서 뛰쳐 나오는 스텝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해일은 거기서 다시 테잎을 재생시켰다.
9. 또다른 악몽(1)
스텝들의 주위로 안개가 다가오기 시작했고 해일의 다들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외침과 함께 스텝들은 저마다고개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모든 스텝들이 떠나고 난 텅빈 마당 폭우속에 혼자 넋을 잃고 앉아있는 김혜진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점차 푸른 안개가 그 농도를 짙게 하며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녀는 광쪽으로 시선을 못 박은채 움직일줄 몰랐다. 카메라 속으로 해일이 다시 나타났고 혜진을 데려가려 애쓰는 그의 표정엔 공포와 조급함이 한데 어울려 모니터를 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안타까움을 더 하고 있었다. 마침내 광에서부터 푸른 섬광들이 어슬렁거리며 기어나오기 시작하고 진흙탕 속에서 혜진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테려가던 해일이 그녀의 손을 놓고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해일의 눈시울이 다시 붉게 젖어 들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이번 촬영에 참가한 여학생입니다. 이제 갖 스물을 넘겼을 뿐인데....."
화면에는 뒷모습만 보아도 확연히 그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을만큼 김혜진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주위를 느릿하게 잔인한 짐승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짐승들의 틈 사이로 죽창을 들고 있는 살인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일이 울분을 삼키며 낮게 응얼거렸다.
"놈들이 짐승들을 통제하는 것 같아요"
살인마들은 김혜진의 앞에 다가와 그녀를 찬찬히 살펴본 다음 주위를 한 번 크게 둘러보곤 자신들의 손에 들린 죽창을 높이 치켜 올렸다. 짐승들이 더욱 으르렁거렸고 그들은 지체없이 죽창을 김혜진의 가슴팍에 내리 꽂았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어둠을 갈랐고 놈들의 죽창은 계속해서 무차별적으로 그녀를 향해 내리 꽂혔다. 이윽고 그들이 다시 뒤로 물러나며 이상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내자 짐승들이 기다렸다는듯 그녀에게 달겨 들었다. 해일은 그곳에서 발작적으로 테잎을 정지시켰다.
그의 볼은 어느새 뜨거운 눈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해일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여기 까집니다. 그 날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화면이 정지되었음에도 혜경과 박호철은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박호철이 중간 중간에 큰 한숨을 몇 번 내쉰게 고작이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혜경이 다시 테잎을 앞으로 되감으며 말했다.
"짐승들이 안개와 함께 나타나던 장면을 한번 더 봤으면 좋겠어요"
해일이 다시 테잎을 재생시켰다. 푸른빛이 도는 안개가 마당에 주저앉은 스텝들을 둘러싸며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혜경이 소리쳤다.
"이걸봐요,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해일과 박호철이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 봤다.
"여길 자세히 보면 전체적인 배경이 뭔가 이중으로 층이 져 있는 것 같지 않냐구요?"
박호철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층이 져요? 글쎄,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자 해일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나는가 싶더니 그다 다시 테잎을 되감아서 그 부분에서 재생시켰다. 그리곤 흥분하여 소리쳤다.
"맞아요, 층이 져 있어요. 정지화면에선 명확히 보이질 않았는데 테잎을 재생시키니까 훨씬 명확하게 보이는군요. 마치 두개의 서로 다른 배경이 겹쳐지는 것 같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박호철이 여전히 알 수 없다는듯 시쿤둥하게 말했다.
"저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혜경이 화면을 짚어가며 그에게 설명조로 말했다.
"박순경, 이 화면을 자세히 보라구. 안개 뒤에 뭔가 한겹 씌워져 있는 것처럼 뿌연 뭔가가 보이지? 그렇지, 여기 이 흉가를 보라구. 실제 흉가와 거의 겹쳐져 있지만 실은 조금 다른 또다른 흉가가 실제의 흉가 위에 교묘하게 겹쳐져 있는 듯한 흐릿한 화면을 보란 말야"
그제야 박호철이 이제 알겠다는듯 소리쳤다.
"어? 정말 그러네? 보여요, 보여!"
"집뿐만이 아니야. 전체 배경이 모두 그렇다구. 흉가 옆에 숲이며 나무들도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이중으로 겹쳐진 것처럼 현실의 배경 너머로 또 다른 배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단 말야! 그리고 그것들이 실제의 배경과 거의 유사하지만 조금씩 다르다구!"
혜경은 마치 강의를 하듯 흥분된 목소리로 화면의 구석 구석을 짚어가며 박호철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먼저 이 흉가도 그래. 두개의 겹쳐진 배경이 거의 일치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있어. 실제 흉가가몹시 낡고 황폐한 반면 뒤쪽에 숨겨진 흉가는 훨씬 정돈되고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구. 그리고 그 주위의 숲과 나무들도 어떤 것은 실제 나무보다 작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실제 배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버젓이 존재하는 나무도 있단 말야!"
박호철의 동공이 잔뜩 커졌다.
"이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거죠?"
이번엔 해일이 나섰다.
"확실치는 않지만 제가 보기에 이 두 개의 배경은 엄밀히 말해서 같은 배경입니다"
혜경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해일을 바라보며 그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해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같은 배경이 이렇게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실제의 흉가 뒤에 숨겨져 있는 흐린 배경속의 또 다른 흉가는 실제 흉가의 과거라고 생각됩니다"
박호철이 소리쳤다.
"과..... 과거라구요?"
"그래요, 과거! 실제의 흉가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흉가가 오랜 세월 동안 허물어지고 마모된 결과가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이 실제의 흉가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우린 지금 저 흉가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보고 있단 말입니다"
"저...... 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박호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난색을 표명하는 것과는 달리 혜경은 환한 미소로 해일의 말에 대답했다.
"정pd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제 생각에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린 지금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말도 안되는 화면을 보고 있는 거예요. 흉가만이 아니죠. 흉가를 중심으로 한 주위의 모든 배경이 현재와 과거가 함께 공존하고 있어요. 갑자기 나타난 그 이상한 안개와 함께.... 대체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거죠? 그리고 이것들이 갑자기 나타난 그 짐승들과 살인마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해일과 혜경이 화면속에 빠져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을때 박호철이 중얼거렸다.
"정pd님, 어디 불 난거 아니예요? 어디서 연기가 이렇게 들어오지?"
그의 말에 해일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곤 바닥을 보았다. 무심코 바닥을 내려보던 해일이 불에 데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혜경과 박호철이 눈을 크게 떴다. 해일의 굳어진 얼굴에서 다소 떨리는 음성이 새어나왔다.
"이건 연기가 아니예요. 안개예요, 푸른 안개!"
9. 또다른 악몽(2)
혜경과 박호철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동시에 소리쳤다.
"안개라구요?"
과연 바닥에는 푸른 빛을 띄는 엷은 안개가 그들의 발목 언저리를 중심으로 조금씩 감싸오고 있었다. 해일이 혜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야 김한수가 어떤 지경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구반장님이 말했던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말의 뜻도.... 놈들이 다시 온겁니다. 지금 이곳에 놈들이 와 있는 것이 라구요!"
그러자 어디선가 익숙한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함께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휘익! 쉭! 쉭!"
혜경이 본능적으로 옷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고 박호철도 뒤쪽에서 총을 빼들었다. 박호철이 다시 안주머니에서 권총 한자루를 더 꺼내서 해일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까 말해준 사용 방법은 기억하고 있죠? 장수사관 총이예요!"
해일은 그에게서 아직은 손에 낯설기만 한 차가운 권총 한자루를 건네 받았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간에 그들은 지금 간밤의 악몽 속으로 다시 빠져 들고 있었다.
세사람의 호흡이 빠르게 급해지고 있었다. 해일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급하게 소리쳤다.
"저기 뒤쪽으로 후문이 있어요! 어서 뛰어요!"
해일이 먼저 뒷문을 박차고 나오자 네온싸인이 번쩍이는 화려한 도시의 밤거리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태연히 휘청거리며 거리를 오가고 있었고 자동차들도 별 일 없이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권총을 들고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온 세사람을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그들은 괜히 멎적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혜경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뭔가 이상해요. 저 사람들 너무나 태평하잖아요?"
이번엔 박호철이 자신들이 뛰쳐 나온 후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저분한 쓰레기가 쌓인 한켠 어둠속에 을씨년스럽게 열어 젖혀진 뒷문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혹시 우리가 너무 신경이 예민해 진게 아닐까요?"
해일로서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도심의 밤거리에 갑자기 그 많은 짐승들이 나타났다면 온 도시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음이 있었을텐데 도시는 너무나 태연했다.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 세사람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의심은 간단하게 풀려 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이 방금 빠져 나온 뒷문에서 막 푸른 광채를 내뿜으며 곧바로 달려오는 짐승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혜경의 총구가 제일 먼저 불을 뿜었다.
"탕, 탕, 탕!"
갑작스런 총성에 길위에 흥청거리던 취객들의 놀란 비명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조용한 도심을 뒤흔들었다. 박호철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집안으로 들어가요, 저것들은 위험한 짐승들입니다. 어서 실내로 들어가 문을 잠그라구요!"
악을 쓰며 세사람은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짐승들은 다른 사람은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똑바로 세사람을 향해서만 달려왔다. 몇 마리의 짐승들이 혜경의 총에 쓰러졌지만 쓰러진 짐승들의 몇배에 해당하는더 많은 짐승들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혜경이 소리쳤다.
"건물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요!"
해일이 얼결에 뛰어든 곳은 바로 나이트 클럽이었다. 앞에서 지키던 덩치 몇 명이 갑자기 뛰어든 그들의 앞을 가로막다가 그들의 손에 들린 권총을 보곤 뒤걸음질 쳤다. 해일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궈요, 어서!"
해일의 소리에 그들은 우물쭈물 하다가 안으로 밀려갔다. 세사람은 그들의 뒤를 이어 안으로 뛰어든 다음 입구의 서텨를 급하게 내렸다. 나이트 클럽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귀가 터질듯한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그들은 낯선 이방인의 침입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잔뜩 긴장한 세사람이 뒤로 물러서며 입구쪽을 바라 보고 있을때 가장 먼저 달려온 짐승 한마리가 입구에 나타났다. 그리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짐승은 셔터문을 그대로 통과하여 곧바로 일행들을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셔터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아무런 저항없이 짐승은 셔터문을 가볍게 통과해 버렸던 것이다. 혜경의 총구가 다시 불을 뿜었고 난데없는 총성으로 나이트 클럽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져 들었다. 이어서 두번째, 세번째.... 짐승들이 계속해서 셔터문을 통과하여 일행들을 향해 달려왔다. 박호철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소리쳤다.
"다들 엎드려! 엎드리라구!"
그런데 그런 박호철의 외침과 달리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사내의 앞으로 짐승이 달려오고 있는데도 사내는 짐승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엉뚱한 곳을 두리번 거렸다. 박호철이 짐승에게 총을 겨누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위험해! 저리 비켜!"
그러나 사내는 박호철의 얘기를 전혀 듣지 못하는양, 그리고 짐승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의아하게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막 짐승이 사내를 덮친다고 생각하는 찰나 짐승은 셔터문을 통과할때와 마찬가지로 사내를 통과하여 곧바로 박호철에게 달겨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었고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황한 박호철이 미처 총을 쏠 틈도 없이 짐승은 곧장 그를 덮쳤다. 박호철이 비명을 지르며 짐승과 한데 뒤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아악! 윤형사님, 사.... 살려줘요, 윤형사님!"
그러나 그러한 아수라장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짐승이나 총소리, 외침소리 따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 시간이 보통때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그런 시간인 것 처럼 보였다. 해일은 계속해서 달려오는 짐승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고 혜경은 호철에게 들겨든 짐승에게 함께 달겨들어 놈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창백한 박호철의 얼굴은 짐승의 미지근한 피로 범벅이 되었다. 박호철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듯 주위를 둘러보며 히스테리컬하게 악을 썼다.
"이건 악몽이야, 말도 안되는 악몽이라구!"
혜경이 그런 박호철을 떠다 밀다시피 하며 악전고투 하는 해일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도저히 안되겠어요, 안쪽으로 달아나요, 어서요!"
세사람은 다시 실내의 더욱 안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그들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함께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춤을 추며 몸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전 짐승들이 그랬던 것 처럼 마치 유령들의 사이를 지나가듯 아무런 저항도 부딪힘도 없이.
"다들 미쳤어! 모두들 미쳐 가고 있는거야, 미쳐가고 있다구!"
짐승에게 물린 팔뚝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도 박호철은 미친듯이 악을 쓰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가 받아 들이기엔 너무나 엄청난 충격임에 틀림없었다. 발버둥치는 그를 혜경과 해일이 붙잡지 않았다면 그는 곧장 짐승들을 향해 달려 갔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춤을 추는 사람들은 세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세사람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요란한 총소리와 짐승들의 으르렁거림 같은 것을 그들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얼마후부턴 아예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하게 변하더니 급기야는 투명하게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라지는 것은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며 테이블이며 하는 것들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과 짐승들을 제외하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그들의 앞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점점 그 형체가 분명해지고 마침내는 완전히 다른 공간속에 그들이 달리고 있는 결과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정신없이 달리던 혜경이 두려움에 휩싸여 소리쳤다.
"맙소사, 이곳은.... 이곳은 바로 목촌리예요, 우린 지금 다시 목촌리에서 놈들에게 쫓기고 있다구요!"
9. 또다른 악몽(3)
갇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편안한 침대며 쾌적한 공기, 그리고 맛있는 식사까지도.... 불과 하루만에 김감독을 비롯 한 세사람은 이 낯선 공간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식사를 가져다 줄 때를 제외하곤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세사람의 고함과 항의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몹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행동했다. 그러한 그들의 친절이 김감독에겐 웬지 더욱 불안하게만 여겨졌다. 배영환이 침대에 몸을 누인채 김감독을 건너다 보며 말했다.
"김감독님, 흔히 돼지는 잡아 먹기 직전에 배불리 먹인다 잖아요? 그리고 사형수들도 사형 집행을 하기전엔 최대한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고.... 전 어째 저들이 우리한테 이렇게 잘 대해 주는게 그런 이유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주는대로 넙죽 넙죽 잘 받아 먹긴 했지만 나 역시 영 뒷맛이 개운칠 않아. 아까 식사를 가져다 주던 식기에 보니까 m정신 요양원이라고 라벨이 붙어 있던데 정신 요양원치곤 너무 호화판이란 말야"
"지금쯤 정pd님과 윤형사, 박순경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그들도 이 곳 어디에서 우리하고 같은 신세로 갇혀 있는건 아닐까요?"
"모르긴 몰라도 결코 아무일 없이 발 뻗고 자고 있지 않으리란건 확실하겠지! 근데 여긴 밤에 잘 때 불도 안 끄나?"
"그러게요? 벌써 자정이 다 됐는데..... 처음엔 벽이 투명하게 되어 있어서 기분이 몹시 이상하더니 지금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도 같아요. 훨씬 넓어보이고 갇혀 있다는 느낌도 덜 들고...."
김감독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벽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좀전과는 달리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 생각엔 분명 저들이 어딘가에서 우릴 감시하고 있어. 불을 끄지 않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거야"
"그럼, 그들이 대체 뭘 관찰하려고 하는 걸까요? 설마 우리가 간밤에 당한 일이 하두 황당하니까 정말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고 이렇게 가두어 놓은게 아닐까요?"
"그건 아닐껄? 그나저나 자네 강은영이 정말 좋아해?"
갑자기 김감독이 화제를 바꾸어 물어오는 바람에 배영환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상기 되었다. 당황하는 배영환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감독은 그의 어깨 너머로 강은영의 방을 흘끗 거리며 훔쳐 보았다.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자신의 침대에 반듯이누워 벌써 세시간째 잠만 자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곳에 들어올때부터 몹시 탈진한 상태였었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 식사 대신 그녀는 링겔을 맞아야만 했었다. 김감독이 다시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어? 강은영이 정말 좋아하느냐고 묻잖아?"
그러자 배영환이 애써 얼굴을 붉히며 핀잔주듯 말했다.
"이런 상황에 꼭 그런걸 물으셔야 겠어요?"
"이거 왜 이래? 둘이 바짝 붙어서 아주 열이 오를대로 올랐던걸? 후후... 둘 사이에 벽 하나 있길 다행이지..... 이런 상황에 남 생각 않하고 그런짓 하는건 괜찮고 내가 그깟거 하나 물어본건 그렇게 흉이 되나?"
"그거야 은영이가 워낙 힘들어 하니까 위로 좀 해주려고 그런거죠"
"이거 왜 이래? 난 진작부터 자네가 강은영이한테 마음이 있다는거 눈치채고 있었는데...."
"에이, 그 얘긴 그만 두자구요, 쑥스럽게.... 이 사람들 정말 불은 안 꺼줄 모양인데요? 불 꺼 달라고 소릴 한번 질러 볼까요?"
"소용없어, 우리 소리에 어디 한번이라도 대답 하는 것 봤어? 그나저나 나도 어젯밤부터 잠 한숨 못 자고 그 난리를 쳤더니 몹시 피곤한데? 까짓거 죽을 때 죽더라도 잠이나 푹 자 두자구!"
"예, 저두 그만 자야 겠어요. 몸이 여기저기 쑤시는게 쓰러지기 직전이예요. 그럼, 밤새 무사히 주무세요"
* * *
두사람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모습을 보고 우일만 박사는 다시 한번 시간을 들여다 보았다. 막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손남의 박사와 장수사관, 그리고 기관원 두명이 역시 긴장된 모습으로 모니터를 지켜 보고 있었고 그들의 뒤쪽으로는 거대한 몸체를 가진 컴퓨터들과 십여명의 연구원들, 그리고 이름을 알 길이 없는 첨단장비들이 넓은 공간에 빽빽히 들어 차 있었다. 그것은 웬만한 연구소 하나를 통째 옮겨다 놓은 모습이었다. 손박사가 말했다.
"우박사님, 시간이 거의 된 것 같은데 정말 박사님이 말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아직은 나 역시 막연한 추측 정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조사한 결과로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나는 지난 10여년간 비밀리에 목촌리 주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가사의한 일들에 대한 연구를 해 왔어요.그리고 목촌리 흉가 주변에 설치된 컴퓨터의 분석에 의하면 일정한 때에 일정한 조건이 맞으면 목촌리에선 현대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한순간에 쏟아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번번히 이상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그 살인사건은 묘하게도 목촌리에서 내뿜는 거대한 에너지의 발생주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전 도무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근 과학계에선 초공간이라는 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요. 즉 이전 과학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왔던 3차원 공간이론이 무너지고 있는 거죠. 3차원에 시간이라는 새로운 공간개념이 도입되어 우주를 4차원으로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4차원보다 훨씬 고차원인 5차원, 10차원의 공간까지도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공간이 어디에 존재한다는 거죠? 길이만 존재하는 1차원이라든가 넓이를 가진 2차원, 높이를 가진 3차원등은 모두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잖습니까? 그런데 그 이상의 차원이 존재한다면 왜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지....."
"그건 우리의 모든 감각과 사고가 3차원이라는 공간에 익숙해지고 적응해버려 그 이상의 차원을 보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손박사도 2차원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얘기를 다룬 공상과학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었죠? 그들은 이미 2차원 공간에만 익숙해져 자연 그 이상의 차원을 보지 못할 뿐 3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는거죠"
우박사는 마치 학생에게 강의하듯 차근차근 손박사에게 설명을 했지만 여전히 손박사는 명확한 개념을 잡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전공 분야는 민속학일뿐만 아니라 물리학에 대한 그의 약간의 지식조차도 민속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 도구로서 흥미를 가졌던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초공간 이론이라는 것과 목촌리에서 벌어지는 그 이상한 일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는 거죠?"
"난 분명 관련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시간들이 각각 다른 차원, 다른 공간에서 별도로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차원과 공간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만약 우리가 다른 차원과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로의 시간적, 공간적 여행도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루트를 흔히 웜홀, 즉 벌레구멍이라 부르는 것인데 그 벌레구멍이 열리려먼 현대 과학으로 한 순간, 한 장소에서 발생시킬 수 있는 에너지 양의 수 천, 아니 수 조 제곱에 해당하는 거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엄청난 에너지가 한순간에 분출된다면 차원간의 통로가 열리는 것이고..... 목촌리에선 바로 그러한 강력한 에너지가 한순간에 분출되었어요. 즉 차원간의 이동이 가능한 벌레구멍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모니터로 들여 다 보고 있는 바로 저 사람들은 그 차원이동의 한가운데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고..... 다시 말해 저들은 일정한 시간과 조건이 형성되면 우리는 볼 수 없는 다른 차원과 공간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손박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소 회의적인 어조로 말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군요"
"저도 처음엔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손박사가 제게 가져다 준 테잎을 보고서야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제가 정pd에게 받아서 보여 드린 테잎 말입니까?"
"그래요, 그 테잎을 자세히 분석해 보고나서 그 테잎안에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알았죠"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공존한다구요?"
손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박사를 쳐다 보았다. 우박사는 손박사를 쳐다 보지도 않은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모니터 속의 세사람을 가리키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요, 지금 저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적, 공간적 조건과 현재의 시간적, 공간적 조건에 동시에 속해 있습니다. 오늘밤 다시 웜홀이 열린다면 분명 저들에게 예측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고 우린 그 초자연적 현상을 화면으로 지켜볼 수 있는 기가 막힌 행운을 가지는 겁니다. 그들이 목촌리에서 겪었다는 그 말도 안되는 일들이 다시 일어날 겁니다"
손박사는 웬지 온 몸이 오싹해지는 기분때문에 그저 묵묵히 모니터만 지켜보는 일이 전부였지만 결코 지루한줄 몰랐다. 그 때 목촌리에서 송신해 오는 각종 정보와 자료들을 검토하던 한 연구원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우박사를 불렀다.
"박사님! 다시 웜홀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9. 또다른 악몽(4)
침대에서 아무리 잠을 청해도 김감독은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그의 본능은 이미 알 수 없는 불안과 위협을 느낀듯 파르르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몇 번 더 자리를 뒤척이며 돌아 누웠을 때였다.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려오고 있엇다. 처음 그는 그 소리를 자신이 잘못 들은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처음엔 거의 들릴락 말락하던 그 작은 소리는 이젠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빠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이제 김감독은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머리끝이 쭈삣하며 온몸의 세포가 한꺼번에 일어서는 전율이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았다. 특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그는 튼튼한 유리벽 속에 갇혀 있었고 옆방의 배영환이나 강은영 또한 아무일 없다는듯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서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보이지도 않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점점 더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 보던 김감독이 끙하는 신음과 함께 낮은 음성을 토해냈다.
"안개....."
그는 어쩔줄 몰라하며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배영환의 방 유리를 힘껏 두들기기 시작했다.
"배영환! 일어나, 어서!"
김감독의 외침에 막 잠이 들엇던 배영환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감독을 바라보았다. 김감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쳤다.
"어.... 어서 강은영이도 깨워, 어서!"
"감독님, 무슨 일인데..... 갑자기....."
"저 소리..... 저 짐승들의 소리가 안들려?"
짐승 소리라는 김감독의 말에 배영환은 잠이 화들짝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과연 김감독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번엔 배영환이 강은영의 방벽을 온 힘을 다해 두들겼다.
"은영아, 일어나! 이 근처에 지.... 짐승들이 있어! 은영아!"
강은영마저 잠에서 깨어났을때 이미 짐승들의 소리는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커다랗게 들릴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강은영이 비명처럼 소릴 지르며 병실 문으로 달려가 마구 두드려 댔다.
김감독과 배영환도 강은영과 마찬가지로 병실 문을 있는 힘껏 두들기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요! 이봐, 여기 아무도 없어!"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문 열라구!"
그러나 아무리 악을 써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짐승들의 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짐승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로 세사람은 병실 안쪽으로 최대한 몸을 붙였다. 그리고 얼마후 강은영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김감독과 배영환이 동시에 그녀쪽으로 시선을 돌렸을때 그녀의 앞에는 푸른 안개 속에서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내고 헐떡이는 짐승 한마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은영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채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거의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사.... 살려줘! 제.... 발..... 서..... 선배..... 살려줘!"
배영환이 불에 데인 것처럼 그녀의 방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안돼! 이 더러운 짐승 새끼야! 은영아, 최대한 벽쪽으로 붙어, 그리고 움직이지마! 놈한테서 눈을 떼지 말고..... 겁 먹지 마, 놈한테 겁 먹은 표정을 보여선 안돼!"
그때 그의 등뒤에서 김감독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그 쪽 신경 쓸때가 아니야, 여기도 나타났으니까!"
김감독의 말에 배영환이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의 코 앞에 짐승의 푸른 광채가 도는 두 눈이 무표정하게 올려다 보고 있었다. 놈은 마치 그를 탐색하듯 예리한 눈길로 그의 빈 틈을 엿보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내 놈이 으르렁거리며 그 잔혹성을 드러낸다고 느끼는 순간 놈의 날카로운 이빨이 재빠르게 배영환을 향해 달겨 들었다.
"악!"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배영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짐승의 이빨이 그의 팔뚝을 물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통증으로 축축한 놈의 검은 털을 움켜쥐는 사이 놀라운일이 벌어졌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실의 벽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김감독과 강은영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막 짐승들이 달겨 들려던 찰나에 병실 안쪽 벽에 기댄채 최대한 몸을 도사리고 있던 김감독은 사라진 벽면의 덕택으로 뒤쪽에 생겨난 새로운 공간으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넘어진 그를 향해 달겨드는 짐승의 차가운 눈빛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가까운 곳에서 고막을 찢을듯이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탕! 탕!"
* * *
모니터를 지켜보던 장수사관이 두려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 사라졌어요! 그들이 사라졌다구요!"
그의 말대로 모니터에선 세사람의 모습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만 해도 허공에 대고 악을 쓰며 비명을 질러대던 세사람이 갑자기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다.
손박사가 우박사를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박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불과 몇 초전만 해도 갑자기 짐승들이 나타났다며 미쳐 날뛰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진거죠?"
그러나 우일만 박사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벌레구멍이 열린게 틀림없어요. 그들은 과거의 또다른 시간과 공간의 차원 속으로 사라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질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분명 그들이 말하던 짐승들이 나타났을 겁니다. 그리고 그 짐승들은 벌레구멍을 통해 다른 차원에서 온 것들일 겁니다. 만약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이제 날이 밝으면 짐승들에게 참혹하게 뜯어 먹힌 그들의 시체만을 볼 수 있을겁니다. 무서운 일이지요"
"그.... 그게....."
손박사는 뭐라고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텅 비어 있는 그 공간에 방금 그 끔찍한 짐승들이 나타나 한바탕 휘저었다는 우박사의 말이 좀체로 믿어지지 않앗던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진 빈 공간을 바라보는 우박사의 눈빛은 가늠하기 어려운 경이로움과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10. 불타는 세상(1)
총소리와 함께 배영환의 팔뚝을 물어 뜯던 짐승이 '캑' 소리를 내며 힘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을 향해 달겨들던 짐승들도 이어진 총성과 함께 동시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병실은 온데 간데 없고 놀랍게도 그들은 깊은 어둠에 잠긴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낯선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김감독님!"
자신을 부르는 낯 익은 목소리에 김감독은 지금 자신이 끔찍한 악몽을 꾸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불쑥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정해일pd 였다. 해일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넋이 나간듯 자신을 올려다 보는 김감독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김감독님이 맞으셨군요. 이렇게 다시 만날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또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강은영과 배영환을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살아 있었군, 다행이야, 다행!"
해일의 뒤를 이어 낯 익은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났다. 혜경과 박호철이었다. 혜경을 보자 김감독이 더듬거렸다.
"이뿐이형사님, 내가 정말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니겠지?"
혜경이 그녀 특유의 단호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불행하게도.... 이건 현실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현실!"
배영환이 자신의 팔뚝을 움켜쥐며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강은영이 황급히 그의 팔을 부축했지만 어느새 그의 팔뚝은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해일이 그에게로 달려 갔을때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고통을 참으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현실이란 말이죠? 또다시 그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거구? 젠장,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기에 이런 생지옥을 헤매는지 모르겠군"
통증이 심한지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말끝은 다소 울먹이는듯 했다. 강은영이 보다못해 훌쩍거리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배선배 힘내요. 다 잘 될거예요. 설마 이대로 죽기야 하겠어요?"
배영환을 힘겹게 부축해 일으키며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하면 되죠?"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혜경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우선은 몸을 숨길 곳을 좀 찾아 봅시다. 놈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 내기 전에.... 다른 곳은 몰라도 저번에 주민들이 숨어 있던 그 창고안은 어쩐지 안전할거란 생각이 듭니다. 다들 그리로 옮기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이견이 있을리 없었다. 창고까지 가는 얼마 안되는 거리가 그들에겐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때마다 어둠속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짐승들의 눈빛이 온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면 그들이 웬일인지 무턱대고 달겨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훨씬 안전해 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놈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잇을 뿐인 것이다. 창고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을 주민이 집단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창고는 이미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지어진 듯 매우 단단하고 견고해 보였다. 바닥에는 짚을 깔아서 냉기를 막아 주었고 안쪽에 등잔이 매달려 있었는데 기름이 가득 차 있어서 불을 붙이자 환하게 실내가 밝아졌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여섯명의 사람이 그 안에 둘러 앉자 제법 아늑한 느낌까지 들었다. 역시 먼저 입을 연 것은 혜경이었다.
"이곳이라고 놈들에게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겁니다. 하지만 일전에 주민들이 이곳에 피신한 모양새를 봐서 그전에도 자주 이곳으로 피신을 했었던 것 같아요. 좋게 생각해서 놈들한테서 그나마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오늘밤 우리 모두의 운명은 이제 이곳에 맡기기로 하죠. 어차피 총알도 거의 없으니까....."
담담한그녀의 목소리에 실내는 침통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특히 박호철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한채 구석에서 몸을 최대한 구부리고 촛점없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배영환은 팔뚝의 상처가 심해서 가까스로 고통을 참고 있었다. 응급처지를 하긴 했지만 출혈이 심해서 이 상태로 얼마간 더 시간이 지속되면 오히려 박호철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강은영은 배영환의 곁에 꼭 붙어서 계속 흐느끼고 있었다. 김감독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짐승들이 신경 쓰이는지 자주 창고문을 흘끗 흘끗 건너다 보며 얼굴에 긴장감을 풀지 못했다. 해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힘겨운 듯 지쳐 보였다.
"우린 지난 몇시간 동안 지금까지 우리가 평생을 겪어온 일들보다 더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중 어느 하나도 우리의 사고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벽속에서 짐승과 살인마가 튀어 나오고, 사람들은 유령이 되어 버리고, 나이트 클럽의 벽이 사라지고 마침내는 결코 꿈에조차 오고 싶지 않았던 바로 이 목촌리에 또다시 이렇게 모였습니다. 결국 우린 모두 다른 사람들이 그랫던 것 처럼 죽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해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번쩍 들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입밖으로 내지만 않았을뿐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해일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해일이 가슴속에서 낡은 노트 한권을 꺼내 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낡은 노트 한권에 집중되었다. 해일은 그 낡은 노트를 소중하게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가신 구반장님의 노트입니다. 진작부터 읽어 보고 싶었지만 저는 의식적으로 이 노트를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형사님과 박호철 순경 또한 저의 이런 마음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나 그 또한 제가 구반장님의 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한번도 그 노트를 읽어 보자는 소릴 하지 않았으니까요. 다들 암묵적인 묵시하에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던 거죠. 왜 그랬을까요? 이 노트안에는 구반장님과 목촌리 마을 주민들, 그리고 제 친구 김한수 기자등 목촌리와 관련되어 죽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적혀 있습니다. 노트를 펼치는 순간 우리 또한 그 안에서 앞서 간 그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정해진 운명을 보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좀 더 솔직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구반장님은 이 일기장 안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대부분이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결국 우리 모두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노트를 보고 나면 우린 더이상 삶의 의지를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우리가 이 노트를 열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요"
해일이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강은영은 더욱 서럽게 흐느껴 울었고 김감독은 빨간 불똥이 극에 달할때까지 깊이 담배를 빨아 들이고 있었다. 해일은 크게 쉼호흡을 한번 한 뒤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깨알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다. 해일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둘러보고 자못 엄숙한 느낌마저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소리내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해일이 노트에 적힌 기록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해일의 목소리를 제외하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이 얘기는 나의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것들과 이후 나를 비롯한 목촌리의 모든 주민들이 겪은 불가사의하고도 끔찍한 비극적 운명에 대한 기록들이다. 전쟁이 끝나자 목촌리에는 전쟁보다 더 가혹한 시련이 찾아왔다. 전쟁중 인민군들에게 가족들을 처형당한 소위 구국 결사대라는 사람들은 목촌리 주민 모두에게 전쟁중 빨갱이들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구실로 사람들을 잡아가 잔혹한 고문과 폭행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주민들을 공비로 몰아세워 무자비하게 처형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전쟁중 인민군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했던 것처럼 도망친 주민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가 하면 훈련된 들개들을 풀어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당시의 혼란한 시기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부나 경찰들은 오히려 그들의 활동을 호의적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잠을 자고 나면 거의 매일 마을 사람들중 누군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주민들을 비롯한 온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구국결사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마을을 벗어날 수 조차 없었다. 지금의 흉가가 있는 자리가 당시에는 공개처형이 벌어졌던 마을 회관이 있던 자리였다.
찌는 듯 한 어느 여름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는 온 대지를 녹여 버릴 듯 그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마을회관에서는 사상범으로 낙인 찍힌 또 한명의 마을 청년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실내에는 구국결사대 수십명과 이젠 그들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수십마리의 두려운 들개들이 광기에 번뜩이며 가엾은 마을 청년의 자백을 강요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회관 주위로 불길이 치솟은 것은 고문에 못 이긴 청년이 거의 모든마을 사람들이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자백을 막 끝냈을 때였다. 불길은 100여평 남짓한 마을회관을 에워싸고 삽시간에 치솟아 올랐다. 이글거리는 태양열보다 더한 열기가 주위를 뜨겁게 달구었다. 건물안에서는 차마 듣기에도 참혹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애원소리가 뒤섞여 이곳이 지옥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불길을 바라보며 불을 지른 마을 이장과 몇몇 청년들은 이 일로 인해 그들에게 가혹한 형벌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가족과 마을 전체를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불길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생각될 즈음 갑자기 어디선가 찢어지는듯한 굉음이 온 마을과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천지가 둘로 갈라지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였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길이 갑자기 안으로 오그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방의 불길은 그 중심부로 여겨지는 어느 곳인가에 구멍이라도 생긴듯 급속하게 빨려들기 시작했고 불길의 중심부에서부터 생겨난듯한 투명한 공기의 파동,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낯선 현상이 물결처럼 주변으로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고 거의 3시간은 족히 타오르던 불길은 차츰 기세를 꺽으며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불길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간 잿더미 위에는 쾌쾌한 유황냄새가 진동을 했고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제대로 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일은 그 잿더미 속에서 한명의 구국결사대나 한마리의 들개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사기관에서는 마을회관의 불을 우연한 화재로 결론지었고 증발한 구국결사대에 대한 수사도 이듬해쯤 되자 차츰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마을엔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 들었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악몽들은 조금씩 잊혀지고 있었다. -
해일이 거기까지 읽었을때 예기치 못한 서너발의 총성이 창고안에서 울렸다. 해일이 읽기를 멈추고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두려운 눈으로 혜경을 바라보았다. 혜경은 창고안을 돌며 나무로 짜여진 벽에다 연거푸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짐승들이 창고 주위를 둘러싼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창고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으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혜경이 총을 쏠때마다 밖에선 광폭한 짐승들의 울음이 들려왔고 창고안에는 매케한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10. 불타는 세상(2)
혜경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 상태론 아침까지 버티기 어렵겠어요! 주위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요. 그리고 놈들이 바닥에서 대가리를 내밀면 가차없이 내려치라구요! 다들 알았죠?"
다부진 그녀의 말에 박호철이 갑자기 딴 사람처럼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까짓 무기로 대항하겠다고? 아직도 몰라요? 밖에 있는 저것들은 유령이라구요. 구반장님의 노트에 써 있는 것처럼 저것들은 벌써 40년전에 죽은 구국결사대와 그들의 들개들이라걸 모르겟어요? 유령과 어떻게 싸웁니까? 놈들은 벽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고 벽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하는.... 우린 결국 모두 죽고 말거예요. 모두 죽을거라구!"
웃음으로 시작한 그의 말은 울먹임으로 끝을 맺었다. 혜경이 반박했다.
"박순경, 당연히 살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저들은 절대 유령이나 귀신 따위가 아니야. 자, 다들 창고 주위를 보세요. 놈들이 이 안으로 들어 오려고 안달을 하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지만 웬일인지 저들은 이곳만은 다른 벽이나 건물을 통과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히 통과하질 못하고 있어요. 지금 저것들의 모습은 그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순한 짐승들일 뿐이예요. 이제 얼마후면 날이 밝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우린 살 수 있어요. 정pd님은 계속 노트를 읽고 나머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순 없잖아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설령 날이 밝아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고 해요. 내일밤은.... 그리고 그 다음날 밤은.... 또 그 다음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요?"
배영환의 외침에 김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팽개쳐져 있던 낫을 움켜잡곤 박호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난 이대로 앉아 당하진 않겠어!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는게 낫지"
김감독의 외침에 강은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두 차라리 싸우겠어요. 이대로 앉아서 기다리다간 죽기전에 먼저 미쳐버릴 것만 같애!"
박호철이 고개를 떨구곤 머리를 무릅 사이에 묻었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혜경이 그의 어깨를 감싸쥐며 토닥거렸다. 해일은 자신이 읽던 노트를 박호철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노트를 읽는 정도는 할 수 있죠?"
박호철의 파리한 눈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일은 박호철의 손에 꽉 잡혀 있던 그의 권총을 빼내며 다짐하듯 말했다.
"모두가 살 수 있을 겁니다. 박순경이 계속해서 노트를 읽을 수만 있다면......"
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영환의 손에도 강은영의 손에도 그럴싸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짐승들은 사방에서 흙을 파헤치며 바닥으로 기어들어 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후면 바닥 이곳 저곳에서 짐승들이 머리를 내밀 것이었다. 배영환과 강은영이 함께 벽의 한 면을 맡았고 나머지 해일과 혜경, 김감독은 각자 벽의 한 면씩을 맡아서 자리를 잡았다. 짐승들이바닥의 흙더미를 후벼 파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릴만큼 위험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박호철은 해일 대신 구반장의 노트를 다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폐허가 된 마을회관 자리에 기와집이 들어섰다. 마을에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든 것은 그때 부터였다. 집을 지은 사람이 이사 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가족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저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 또는 두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라진 사람들은 어김없이 다음날이나 혹은 그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는 예전 구국결사대가 사람들을 처형했던 바로 그 모습대로였고 시체들 중에는 그들이 데리고 다니던 들개의 존재를 짐작케 할 만한 것들도 있었다.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구국 결사대와 들개들의 망령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들은 실제로 주민들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아직도 불과 몇분전의 일처럼 생생히 그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자연의 법칙과 현실의 상식을 뛰어넘는 믿기 어려운 일이 내가 열다섯살이 되던 바로 그날 밤에 주민들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놈들은 13년전 그들이 불길과 함께 사라졌던 그 모습 그대로 유령처럼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에겐 현실의 시간이 완전히 멈춰 버린 듯 완벽한 모습으로 주민들을 다시 사상범으로 몰아 세우며 마을을 지배하려 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목촌리는 다시 과거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바로 코 앞에 버티고 있어도 목촌리 주민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어느 누구도 목촌리 주민들을 그들로 부터 보호할 순 없었다. 일부 마을을 떠난 주민들도 그들에게서, 그리고 목촌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리 멀리 달아났던 주민이라도 밤이 되면 결국 자신이 헤매고 있는 곳은 바로 이곳 목촌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목촌리 주민들의 운명은 두가지였다. 그들에게 끌려가 처형을 당하던지, 미친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을 택하든지.... 사람들은 그들을 저승사자라고..... -
박호철이 마지막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김감독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라, 이 더러운 짐승아, 죽어!"
과연 김감독이 맡은 벽면의 맨 구석쪽에서 들개 한마리가 흙바닥에서 막 고개를 치켜들고 몸을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김감독은 손에 들고 있던 낫으로 짐승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감히 어딜 들어와! 네깐 놈들이 감히 어딜 들어와!"
짐승의 검은 머리는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고 김감독은 있는대로 악을 쓰며 낫을 휘둘러 댔다. 짐승의 머리가 힘없이 축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번에는 해일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해일의 쪽에선 두마리가 동시에 땅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것들은 푸른 빛이 도는 광기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마리는 거의 땅에서 몸을 빼낼 뻔 했다. 그리고 그것은 끔찍한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벽의 사방에서 짐승들은 머리를 치켜들었고 창고안은 비명소리와 총성, 그리고 짐승의 으르렁거림등으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모두가 정신없이 사면으로 짐승들과 싸우는 사이 박호철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혜경이 고개를 돌렸을때는 이미 박호철의 몸이 절반쯤 짐승에 의해 바닥에 난 구멍으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박순경!"
혜경이 악을 쓰며 쓰러지듯 그의 다리를 붙잡고 몇초간의 실랑이 끝에 다시 위로 잡아 올렸을때는 이미 그의 머리의 절반은 짐승의 입속에 있었고 그의 머리를 물고 있는 짐승은 혜경의 존재는 아랑곳 없다는 듯 탐욕스럽게 자신의 할 일에 충실하고 있었다. 혜경이 비명을 지르며 총구의 방아쇠를 당겼고 총성은 한발, 두발.... 총알이 떨어져 더이상 총성이 들리지 않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를 뜯어 말린 것은 해일이었다. 그는 박호철의 시체를 보곤 고개를 돌렸고 혜경은 미친 듯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혜경이 해일의 손을 뿌리치며 죽은 짐승의 머리를 권총으로 다시 내려치며 악을 썼다.
"다 죽여 버릴거야, 모두 다!"
"윤형사! 정신 차려요! 이래선 안되요!"
"놔! 놓으란 말이야! 저리 비켜!"
그때 해일의 재빠른 손이 그녀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그녀가 흠칫하며 해일을 올려다 보았다. 해일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들어요, 윤형사! 박순경은 이미 죽었어요. 그리고 이 상태라면 잠시후 우리 모두 박순경과 마찬가지로 죽고 말거요. 내게 한가지 방법이 있어요. 우리 불을 지릅시다. 저기 창고문을 박차고 나가 닥치는대로 불을 지릅시다. 짐승들이니 불을 두려워 할거요!"
해일의 간절한 눈빛이 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경의 눈빛이 잠시 동요한다 싶더니 이내 그녀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그들의 등뒤에서 다시 강은영과 배영환의 비명이 들렸다. 배영환이 짐승 한마리와 뒤엉켜 뒹굴고 있었다. 강은영이 함께 짐승에게 달겨들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도와줘요! 어서요! 도와줘요!"
해일은 지체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바닥에 가득 쌓여있는 짚더미를 한웅큼 움켜잡고 불을 붙였다. 마른 짚더미는 순식간에 불길을 빨아 들였고 그는 짚더미를 배영환에게 달겨든 짐승에게 휘둘렀다. 짐승은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배영환에게서 떨어져 구석으로 몰렸다. 그리곤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하려는듯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렸다. 짐승의 푸른 눈동자에선 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다들..... 짚더미를 벽면을 몰아요. 가운데 공간과 출구쪽만 남겨두고 나머지 짚더미는 모두 벽면으로 몰아요!"
해일의 외침에 김감독과 혜경이 허겁지겁 바닥에 짚들을 긁어서 창고의 주변으로 밀쳐냈다. 그러나 배영환은 온 몸이 피범벅이 되어 움직이질 못했다. 강은영과 김감독이 가까스로 그를 실내의 가장자리로 끌고 왔다. 일행은 모두 가운데 흙바닥 위에 모여 있었고 주변으로는 짚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짚더미 위로 여기저기 짐승들이 고개를 들이 밀었다. 해일은 주위로 쌓여진 짚더미에 불길을 던졌다. 순식간에 불길이 번져 나갔다. 놀란 짐승들이 캑캑거리며 그들이 고개를 내밀었던 그 구멍을 통해 다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뜨거운 열기가 타올랐다. 해일이 소리쳤다.
"다들 옷을 벗어서 막대에다 말아요. 그리고 거기다 불을 붙여서 이곳을 나갑시다. 밖으로 나가서는 닥치는대로 불을 질러요. 아예 이 저주받은 목촌리와 저 짐승들과 살인마를 모두 불로 태워 버립시다!"
10. 불타는 세상(3)
해일은 배영환을 들쳐 업고 나머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옷으로 만든 횟불을 손에 들었다. 제일 먼저 창고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은 역시 혜경이었다. 그녀는 창고 밖에서 기다리다 달겨드는 짐승들에게 렀불을 휘둘러 댔다. 짐승들과 살인마들이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뒤늦게 창고를 뛰쳐나온 해일은 그 광경을 보고 마음이 다급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에겐 조금도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의 주위에도 그녀 못지 않게 많은 수의 짐승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잠시 후 해일의 주위로 나머지 일행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불덩어리처럼 빙 둘러 서서 렀불을 휘둘렀다. 하지만 혜경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김감독이 소리쳤다.
"닥치는대로 불을 질러! 집이고, 나무고, 들판이고 모두 눈에 보이는대로 불을 질르라고, 어서!"
모두가 김감독의 말대로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악마의 숨결처럼 불길이 솟아 올랐다. 짐승들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불길이 솟아 오르자 주위는 어듬이 걷히고 대낮처럼 환해졌다. 불길에 살인자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 구국 결사대들의 모습은 실종 당시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법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선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때 뒷쪽에서 김감독의 외침이 들려왔다.
"정pd! 윤형사, 윤형사가 위험해!"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옆을 돌아보니 불길 속에서 한떼의 짐승들과 살인마들이 혜경을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이미 그녀의 모습은 지치고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그녀는 나머지 일행들과 불길에 의해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흩어졌던 짐승들과 살인마들이 약속이나 한듯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해일은 몇번이나 불길속을 뚫어보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일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윤형사! 윤혜경... 윤혜경.... 윤혜경!"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서서히 불길과 무리들 사이로 묻혀 가고 있었다. 참기 어려운 아픔과 절망이 해일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는 마치 울부짓듯 혜경의 이름을 불러댔다. 마침내 혜경의 모습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해일은 넋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불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고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이 아득하게 눈에 들어왔다. 불길은 해일의 주위로도 서서히 조여들고 있었다. 남은 일행들도 불길을 피해 발버둥을 쳤지만 해일은 그들의 행동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목촌리 어디를 가든 뜨거운 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완전한 화염에 쌓인 목촌리가 자신의 최후를 맞이 하려는듯 마지막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칠흙같던 밤하늘도 어느새 거대한 불기둥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고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해일은 그 아름답기조차 한 불의 향연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도 더이상 행운이 따르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이미 얼굴은 뜨거운 열기로 바싹 달아 올라 있었고 불길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물 먹은 스폰지처럼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는 육체와는 달리 정신은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같이 했던 스텝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간 사라졌다. 불길의 정도로 봐서 김감독과 강은영, 배영환조차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김한수가 처음 자신을 편집실로 불렀을때의 일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의 두려운 눈길도 함께 기억해 냈다. 다음으로 그의 의식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굴은 바로 윤혜경이었다.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녀에게 생각이 미치자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함이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찾아 들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혜경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해일의 가슴에 들어와 있었다. 그건 해일 본인조차 전혀 의식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눈빛이 마주칠때면 예외없이 두근거리던 자신의 뜨거운 심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시간에 그녀를 만났다면 그들의 만남은 상당히 다른 형태를 띌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얼마후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테니까. 이제 불길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로 다가서 있었다. 해일은 반듯하게 그 자리에 누웠다. 유난히 별이 많은 밤이었다. 자신의 몸이 불탄다는 예감을 느끼며 막 눈을 감을 때였다. 그것은 '쩍!'하고 천지가 둘로 갈라지는 듯한 소리였다. 온세상을 뒤흔들고도 남음이 있을 그 엄청난 소리에 해일은 번쩍하고 눈을 떴다. 거센 기운이 어딘가로 불길을 빨아 들이고 있었다.
힘을 받은 불길은 더욱 맹렬한 속도로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빨려 들어가는 것은 불길만이 아니었다. 불길을 피하며 날뛰던 짐승과 살인마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들의 몸은 기이하게 뒤틀리고 길게 늘어져 불길과 함께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빨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진공 청소기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천지가 뒤바뀌는 것 같은 엄청난 굉음에 해일은 자신의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뒹굴렀다. 굉음만으로도 온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엄청난 압력이 자신의 내부에서 분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압력은 어느 한 방향으로 불균형하게 솟구쳐 오르더니 마침내 그의 온몸을 뒤틀어 놓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잠시후 그는 자신의 세포 하나 하나가 짐승들의 그것처럼 느슨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세포들 각자는 어딘가로 끌려가려는 강한 힘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의식조차도 조그만 파편으로 조각 나 한 방향으로 빠르게 끌려 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의 필림처럼 의식의 파편들이 그의 의식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분해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 엄청난 기운과 기세에 온몸이 부서져 흩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11. 산 자와 죽은 자(1)
갑자기 m 정신요양원 내 비밀 연구소에 전력이 불규칙하게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연구소내에 설치한 계기들은 저마다 통제력을 잃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직 목촌리에 설치해둔 컴퓨터 자료를 전송하는 계기만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남의 박사가 불안한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요? 이곳은 비상 전력 시스템까지 갖추어진 곳인데....."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계기로부터 전송되어 온 자료를 받아든 우일만 박사의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손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시죠, 박사님?"
고개를 든 우일만 박사의 눈자위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양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엄....청.....난 에너지야, 정말 놀라워!"
한참만에 우박사가 신음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흥분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지금 내 손에 들린게 뭔지 아시오? 이건 목촌리에 설치해둔 컴퓨터가 전송해온 자료인데 이 자료에 의하면 방금 목촌리에서 수치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의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했소. 그리고 그 에너지의 양은 현대 과학으로 한 순간에 발생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에너지보다 수 만배에 또한 그만큼의 제곱을 한 정도보다 더 큰 양에 해당하는 것이오"
이번엔 손남의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는 도무지 우박사님이 말한 그 숫자가 의미하는 에너지가 어떤 에너지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체 얼마나 큰 에너지이길래?"
"작은 우주 하나를 새로 창조해 낼 만한 크기의 에너지라고 하면 이해가 가시겠소? 방금전 목촌리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웜홀(벌레구멍)이 생겨 차원간의 이동같은 커다란 이변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연구소내에 계기들이 통제력을 잃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모니터를 지켜보던 장수사관이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바... 박사님 여기....."
장수사관의 말에 우박사와 손박사는 서둘러 모니터로 돌아왔다. 모니터는 여전히 불과 몇 시간전 세사람이 갇혀 있던 텅빈 병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병실안에서 눈에 보일듯 말듯한 공기의 커다란 파동 같은 것이 육안으로도 식별할만큼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장의 진동이 잦아 들면서 사라졌던 세사람의 형체가 흐릿하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의 형체는 더욱 분명해 지고 뚜렷해졌다. 그리고 얼마후 그들은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김감독과 배영환, 강은영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누운채로 꼼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11. 산 자와 죽은 자(최종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해일은 볼을 타고 전해지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의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세포 하나까지도 제 것이 아닌 양 그 본래의 응집력을 잃고 저마다 늘어져 있었으며 의식은 깜빡이는 백열등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다만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기억의 조각들이 의식속을 찾아 들었다간 다시 사라지곤 하였다.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해일은 많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는 어김없이 악몽같은 목촌리의 밤들이 등장하곤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여 보려고 조금씩 꿈틀거려 보았다. 뼈마디 하나까지도 삐거덕거리는 뻐근한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강렬한 빛이 한줄기 그의 의식속을 찾아 들었다. 그는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균형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다시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둔탁한 통증이 머리에 전해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강렬한 통증이 그의 의식을 빠르게 회복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없이 늘어져 있던 그의 세포 조각들도 순간적인 응집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은 다음 천천히 눈을 떴다. 빛은 머리 한참 높은 곳에 난 창틈으로 비추어 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낯선 장소. 그는 처음 자신이 있는 곳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자신이있는 이곳은 바로 어젯밤 짐승들에게 쫓겨 달아났던 나이트 클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럽 안은 텅비어 있었고 을씨년스럽게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 몇개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는 새삼 자신의 온 몸을 어루만졌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때 그의 뒤쪽으로 물컹한 감촉의 물체가 손에 잡혔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을때 거기에는 뜻밖에도 박호철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그는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죽은 박호철을 쳐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빠르고 생기있게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마른 음성이 튀어 나왔다.
"혜경..... 윤혜경, 윤형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혜경의 이름을 부르며 부지런히 클럽 구석 구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마른 음성은 공허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클럽안을 한바퀴 돌아 다시 그의 귀로 돌아왔다. 그리곤 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해일은 클럽안 어디에도 혜경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 한가운데 뻥하고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심한 현기증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운 피로가 그의 온몸을 엄습해 왔다. 바깥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잠시후 그는 먼 의식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소음들을 들으며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 * *
해일이 눈을 떴을때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희미한 어둠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그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 하나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김감독이었다.
"어떻게?"
해일은 몸을 일으키려다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온몸의 뼈마디 하나까지 전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아픔이 한순간 살아났다 다시 사라졌다.
"아직 움직이지 말아요. 우선은 안정을 하는게 제일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여긴 어딥니까?"
"걱정말아요. 다 끝났어요.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
그는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 맡에는 누가 갖다 두었는지 꽃다발이 여러개 놓여 있었고 그의 옆 침대에 김감독이 걸터 앉아 있었다. 김감독의 팔에선 투명한 관이 빠져 나와 있었는데 해일은 그것이 링겔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병실은 밝기가 낮은 조그만 등 하나로 밝혀져 있었고 기분 나쁠만큼 아늑한 고요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의사가 눈을 뜰때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을 상할 수도 있다고 이렇게 어둡게 해 놓았소. 덕분에 나는 심심해서 죽는줄 알았지. 책도 한 권 제대로 못 읽고 말이야. 정pd는 사흘만에 깨어난 거요"
"사흘만에 깨어났다구요?"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났는데 정pd만 이제 깨어난거요"
"다른 사람들.... 누구죠? 누가 살았죠?"
"강은영, 배영환..... 그리고 나하고 당신......"
"그게 전분가요? 윤형사는..... 윤혜경 형사는 어떻게 되었죠?"
김감독은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촘촘하게 브라인드가 쳐져있었다. 그 사이로 가늘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밤은 아닌 모양이었다.
"묘한 일이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체라도 발견되었는데 윤형사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소.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구만!"
김감독은 허리를 굽혀 양말을 뒤집더니 그곳에서 담배 한개피를 끄집어냈다. 그리곤 입에 물고 역시 양말 속에 숨겨둔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길게 한모금 토해 내며 말했다.
"산다는게 참 묘한거요. 불과 몇 일전만 해도 등뒤에다 늘상 죽음을 엎고 다녔는데 막상 살고보니 의사들이 건강에 해롭다고 이 조그만 담배 한개피도 제대로 못 피우게 하는게 아니겠소? 모르긴 몰라도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건 그런 차이인 것 같소. 윤형사.... 좋은 아가씨 였는데 참 안되었소. 그저 어딘가에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 수 밖에....."
넋두리 같은 김감독의 말을 귓전으로들으며 해일은 그녀와의 처음 만남을 떠올렸다. 아니 엄격하게 말하면 처음 만남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고 짜릿한 감정을 느꼈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목촌리를 빠져 나가며 렌턴 불빛속에 드러났던 청순하고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
* * *
희생자들의 합동 장례식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이정란을 비롯하여 오세창, 이정우, 박희철, 박호철등이 그 장례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각각의 희생자들의 유족들 속에 배영환과 강은영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배영환은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휄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례식에 참가한 것이었다.
해일은 행렬에서 다소 떨어진 언덕배기에서 혼자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생존으로 또는 죽음으로 그 악몽의 시간들을 끝을 맺었지만 해일은 그들처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 일을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처럼 기억속에 묻을 수가 없었다. 뭔가 아직은 해결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아쉬운 여운이 그의 마음을 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착찹한 마음의 한가운데는 윤혜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윤혜경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그녀의 행방은 실종으로 처리 되었고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사망으로 그 꼬리표를 다시 바꿀 것이었다. 그러나 해일은 그녀의 사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에 그녀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내내 그의 가슴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그의 공허한 마음까지 채워줄 순 없는 일이었다. 삼일도 채 되지 않는 그녀와의 짧은 만남이 그에게 이토록 긴 마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리라고는 해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혜경이 그녀 특유의 넉넉함과 씩씩한 미소를 머금고 불쑥 이곳에 나타날 것만 같아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도 쉽게 자리를 뜨질 못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사랑은 미처 사랑임을 느끼기도 전에 또한 예기치 않게 떠나버린 것이다. 그는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젠 완연한 겨울임을 실감케 하는 매서운 바람이 한웅큼의 낙엽을 실은 채 그의 곁을 스쳐갔다. 해일은 추위로 얼어붙은 육체보다 더 서늘한 가슴을 싸안고 내키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 * *
"왜 여태 결혼하지 않으셨어요?"
여자가 자못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글세요, 뭐..... 직업적인 이유도 있겠고, 또..... "
해일은 말을 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문득 오랜 기억속에서 혜경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생각하시는거 아니예요?"
"왜 그런 생각을......"
"그냥 직감이죠, 뭐.... 여자들만의..... pd라는 직업..... 참 재밌는 일일 것같아요. 그쪽 사람들 결혼해도 일에 매달려 얼굴 보기도힘들다던데...."
"분야에 따라서는 재밌는 직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제 분야는 별로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유명한 스타들과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려한 조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한한 인내심과 근성이 있으면...."
그녀는 시쿤둥한 해일의 말에 다소 기운이 빠지는지 몸을 의자 뒤쪽으로 기울이며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따분하다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분명 pd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흥미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게 틀림 없었다. 오늘 그녀와의 자리를 주선한 것은 조연출 하준민이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때까진 시간을 같이 보내도록 노력해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해일은 여자와 마주 앉은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해일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그만 나갈까요?"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해일을 올려다 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얼굴엔 약간의 불쾌감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커피숍을 나섰을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해일의 기억으로 올해의 첫 눈이었다. 커피숍에 있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수복하게 쌓인걸 보면 상당히 많은 눈이 올 것 같았다. 해일은 묵묵히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 보았다. 그녀의 기분은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집에 어떻게 가십니까?"
"차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다른 약속 있어서 어딜 좀 가야 해요"
"그러시군요. 그럼,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겠군요"
"그래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곤 날쌔게 뒤돌아서서 오던 길을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보며 해일은 오늘 그녀를 만난 일에 대해 씁쓸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나이도 마흔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겨준 목촌리의 기억도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속에 조금씩 묻혀지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그는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결함이 때론 훌륭한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해일은 늘 감사하고 있었다. 김감독은 그때 이후 방송일을 그만 두고 작은 음식점의 주인이 되었다. 언젠가 한번 가게에 들렸을때 카메라 대신 앞치마를 두른 김감독의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혼자 웃음을 머금었던 기억을 그는 아직 가지고 있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봐 정pd, 난 처음부터 아주 음식점 주인을 할 껄 그랬어. 손님들이 내 얼굴만 보면 구수한 국밥이 떠오른다지 뭐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누라하고 애들이 여간 좋아하는게 아냐. 그 전에는 내가 1년 365일 어디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있었나? 그야말로 장똘백이처럼 밖으로만 싸돌아 다녔지. 이젠 가족들한테 좀 잘 해야겠어"
강은영과 배영환은 10년전 그 일이 있은 바로 이듬해에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해일도 누구보다 반가운 마음으로 참석했었다. 결혼후에도 두사람은 여전히 티격태격 싸우면서 각자의 일들을 하다가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강은영은 일을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집에 들어 앉았다는 얘기를 오래전에 들었다.
최근에 아이가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며 들떠서 전화하던 배영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했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해일 자신뿐이었다. 최근에 오늘처럼 몇 번 선을 보긴 했지만 자리에 나갈때마다 선뜻 내키지 않는 어떤 미련을 그는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미련의 뒤편에는 여전히 혜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방에 대한 의문은 집요하리만치 해일의 삶을 쫓아 다녔다. 해일의 생각과는 달리 어쩌면 그녀는 이미 어딘가에서 나름대로의 새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단지 그녀가 어떤 이유로 굳이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에 대한 해일의 감정같은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해일이 그렇게 과거의 기억속을 더듬으며 눈길을 걷고 있을때 누군가 그의 어깨에 강하게 부딪히는 사람이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에 해일은 휘청하며 그 자리에 넘어질 뻔 했다. 그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앞을 보았을때 그의 앞에는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가 자신과 방금 부딪힌 여자임을 해일은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주위에 흩어진 선물 꾸러미를 주섬주섬 주워담고 있었다. 눈위에 흩어진 그녀의 짐을 하나 줏어서 건네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해일의 눈길이 순간 빛났다. 짐을 줏어 챙기다 말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해일의 눈길을 대하고 여자는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시죠?"
"저기..... 혹시..... 윤.....혜......경?"
"네?"
"윤혜경씨 아닌가요? 저 기억하지 못 하겠어요? 정해일입니다. 정pd! 옛날에 다큐맨터리 찍으러 갔다가....."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죄송하지만 전 윤혜경이란 사람 몰라요"
여자는 전혀 낯선 표정으로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잠깐만요, 예전에 목촌리..... 정말 기억하지 못 하시겠어요?"
"목... 촌....리요? 거기가 어디죠?"
"아.... 제....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요"
"괜찮아요. 세상에 비슷한 사람은 워낙 많으니까요. 그럼....."
그녀는 가볍게 인사하곤 몸을돌려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갔다. 해일은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은채 그 자리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녀는 저만치 앞 서 가다가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해일을 발견하고 그녀는 얼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순히 닮았다는 표현으론 너무나 부족할만큼 그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10년의 세월동안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가던 혜경의 모습을 그녀를 대하는 순간 분명하게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후 해일은 자신의 상상이 얼마나 엉뚱하고 멍청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했다. 해일이 기억하는 혜경의 모습은 분명 10년전의 그녀의 모습이었고 방금 그가 대한 바로 그 여자 또한 10년전 혜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그녀에게만..... 시간이 흐르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면 몰라도. 해일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자신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사이에도 어지러운 눈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머리와 어깨위로 내려 앉았다. 해일이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것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저녁내내 그는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바로 10년전 자신들이 처음 목촌리를 찾은 날이었다. 그 날은 끊임없이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이른 첫눈이 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얼큰한 취기에 몸을 기댄채 비틀거리며 눈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가끔씩 악몽을 꾸곤 한다. 그리고 그 악몽속에선 예외없이 혜경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얼굴을 오늘 낮에 우연히 어떤 여자로 인해 기억해 낸 것이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취하지 않고선 차갑게 비어있는 그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눈길위에 쓰러지며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무서운 비명이던지 그는 한순간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막 가로등 아래로 거의 정신을 잃을 듯한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의 팔에서 진홍색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내는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해일을 향해 달려왔다. 사내의 팔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하얀 눈길위에 수를 놓듯 떨어져 내렸다. 사내가 해일에게 거의 쓰러져 안기듯 무너져 왔다. 해일은 사내를 부축하려다 중심을 잃고 사내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역시 술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이었다.
"제발, 선생님 살려 주세요, 제발!"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극도의 공포심이 사내의 모든 육체와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해일은 순간적으로 사내의 공포가 웬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음에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그의 온 몸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사내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말들을 쏟아 부었다.
"짐승들.... 짐승들이 나를 물어 뜯으려고 해요. 저기..... 푸른 안개가 보이죠? 당신도 보이죠? 안개가 나타나면 놈들이 나타난 증거예요. 저 소리..... 제발 살려 주세요"
순간 해일은 자신의 온 세포가 경악하며 소스라치게 일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해일은 사내가 보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푸른안개 같은 것도 없었다. 그건 사내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내가 엉금엉금 기듯이 달아나다 비명을 지르며 다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내는 공허한 밤하늘에 시선을 주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저.... 저리가! 저리가!....... 뭐, 뭐라구? 해..... 일?"
넋을 잃고 사내를 바라보던 해일의 의식속으로 자신의 두마디 이름이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사내가 두려운 눈으로 해일을 돌아보았다.
"다.... 당신 이름이 정해일이란 사람이요? 어서.... 어서 대답해요"
해일은 어떤 예감에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내가..... 정해일이요"
사내가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마치 그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앗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공포에 젖어 있었다.
"여기.... 여기..... 윤혜경이란 사람이..... 다.... 당신에게 자신이 바로 곁에 있단 말을 전하랍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자 마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재빠르게 허공에다 말했다.
"그... 그럼 정말 날 살려주는 거죠? 저 짐승들로부터 날 보호해주는거죠? 아.... 알았어요, 알았어! 으악!"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해일은 감전된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곤 사내가 바라보던 곳을 향해 섰다.
"혜경? 윤혜경, 당신이오?"
그러나 어둠만이 그를 응시할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엔 해일이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이오? 지금 날 보고 있는 것이 당신이냐구!"
그의 입에서 파란 입김이 어둠속에 퍼져나갔다. 해일은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이윽고 그는 하얀 눈위에 무릅을 꿇으며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위로 눈발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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